마주할 용기는 사소할까
“하온! 하온! 정신 차려봐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익숙한데, 낯설다.
하온은 눈을 뜬다. 익숙한 천장에 익숙한 공기.
낯선 천장이 아니라, 그런 뻔한 이야기. 그게 더 낯설다.
“어…”
하온의 얼굴은 마취크림을 바른 듯 기괴하게 움직인다.
표정은 멀쩡한데, 표정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푸핫, 거울을 잡고 보여주고 싶은데 아쉽네요!”
선월이 장난기 섞인 말투로 웃는다.
아무래도… 그러니까 지금 이건, 꿈이 아니다.
하온은 숨을 한번 길게 들이쉬었다. 가슴이 조여 온다.
“… 다시 온 거군요.”
선월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번엔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짓궂게.
“그래요, 돌아왔네요. 우리.”
“우리?”
하온의 말에 선월은 고개를 기울이며 하온을 바라본다.
의아한 표정이지만, 어딘가 장난기 어린 눈빛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우리’였죠?”
선월은 다 알면서 물어본다. 참 짓궂게.
“손을 잡고 달린 순간부터요.”
하온은 조용히 눈을 내리깐다.
그 대답은 이상하게도 따뜻했고, 동시에 어딘가 불편했다.
그래서, 결국—묻는다.
“… 어땠나요? 우리.”
처음으로, 하온이 선월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관계에 대한 질문, 함께였던 그 시간에 대한 질문,
그리고—그 아이가 바라보던 ‘우리’에 대한 질문.
선월은 짧게 숨을 내쉰다.
작게 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든다.
“우리요? 어머, 저는 그 자리에 없던걸요?”
말은 가볍게 튀어나왔지만,
공기 속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하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는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러다 말없이 웃는다.
무너지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게 더 편할 때가 있다.
“… 그래요. 당신은 항상, 거기 없었죠.
그 자리는… 결국 혼자였으니까.”
선월은 장난기 없는 눈으로 조용히 그를 바라본다.
“그 자리가 혼자였던 건,
당신이 누구도 앉히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온은 다시 웃는다.
그 웃음은 이번엔 조금 비틀렸다.
“이 이야기는… 내 기억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의 기억을 찾아가는 거군요.”
말하면서 하온은 깨달았다.
이 여정은 결국, 자신이 오랫동안 외면해 온 ‘그 아이’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그리고 처음으로, 이 이야기의 끝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동시에—두려워졌다.
그 끝에 서 있는 존재가 누구일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아.
그 아이도… 선월, 당신이었나요?”
선월은 잠시 침묵한다.
웃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는다.
다만 천천히 하온을 바라본다.
그 눈동자엔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의 평온과,
아직 말하지 않은 슬픔이 겹쳐 있었다.
“그 아이는…”
그녀가 낮게 입을 연다.
“늘 당신 뒤에 있었죠.
당신이 돌아보지 않았을 뿐.”
하온은 눈을 내리깐다.
심장이 뻐근했다.
무언가 차오르다가 멈췄다.
“그럼…
내가 그 아이를 그렇게 외면했던 게…
결국, 당신을 미워했던 건가요?”
목소리가 떨린다.
“아니면… 나 자신을?”
선월은 조용히 걸음을 멈춘다.
뒷짐을 풀지도 않고, 그냥 등을 돌린 채 말한다.
“그게 저라면, 뭐가 달라지나요?”
그 말이 등 뒤로 가볍게 흘러나왔다.
무심한 척했지만, 분명히 흔들림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하온은 입을 열지 못한다.
하지만 침묵이 말을 대신한다.
어딘가, 뜨겁고 무너지는 감정이 안에서 터진다.
“… 싫었어요.”
그가 말했다.
처음으로, 망설이지 않고.
“진짜, 너무 싫었어요.
그 애도, 당신도…
아니, 사실은 나 자신이요.”
그리고 나직하게 덧붙였다.
“근데… 그게 나였다는 걸 알게 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월은 그 말에 작게 웃는다.
어딘가 슬프고도 따뜻한 얼굴이다.
“알아가 보죠.
당신이 그 아이를,
아니면 나를,
아니면… 스스로를 너무 미워서
모른 척하게 된 계기가 뭔지.”
정적.
하온은 한참을 서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망치지 않을게요.
이번엔, 끝까지 마주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