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 세계를 부수는 사람에게 끌린다

허락을 구하는 것보다 용서받는 게 더 쉬운 이유

by 보월

한 바퀴는 생각보다 길다.

하온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질 때,

하온이 이걸 왜 하고 있는지조차 대답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그리고, 한 바퀴는 생각보다 짧다.

옆에 있던 현이라는 사람의 침묵이 깨지기 적절한 시간.

그가 입을 열었을 때, 호기심과 무례함 사이의 경계는 너무도 가볍게 허물어졌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의 호기심은 하온의 가슴을 불편하게 눌러왔다.

“어... 네...?”

“몇 살이세요?”

현은 물러나지 않았다.

하온의 세계는 원래 낯선 발자국이 쉽게 닿지 않는 곳이었다.

질문과 대답, 그리고 고요한 숨결로만 유지되던 공간.

하지만 현은 문턱에 머무르지 않았다.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그저 숨을 섞고, 시선을 주고, 마음을 흔들었다.

하온의 땀이 눈으로 흘러들어 순간 눈을 찡그리자, 현이 말을 던졌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말 놓을까?”

무례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왜 이런 식으로 굴까.

호기심일까, 아니면 그냥 타고난 태도일까.

그런데도 하온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대로,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하온은 언제나 주어진 상황을 개척하기보다,

운명에 순응하는 쪽이었으니까.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나이는 왜...?”

현은 밝게 웃으며 신난 듯 이야기한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지만, 또래를 만나기가 참 힘들었거든!”

그는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너무 좋은 듯 방방 뛰었다.

“하온, 하온은 왜 뛰는 거야?”

“...!”

감 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사람의 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건 얼굴 표정이래, 하온은 뛸 때, 그리고 목적을 달성한 지금도 상쾌해 보이지 않아서 그래”

현의 말이 떨어지자, 하온은 순간 숨이 막혔다.

얼굴까지 읽히는 기분이었다.

불쾌해야 마땅한데, 그 말이 묘하게 가슴에 걸렸다.

나는 늘 감정을 숨겨왔다.

웃을 때도, 대답할 때도, 심지어 혼자 있을 때조차.

상쾌해 보이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몰랐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웃어 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현은... 왜 뛰는대요?”

“그냥.”

“네?”

“그냥 뛰어. 뛰는데 이유 같은 걸 댈 정도로 대단한 일이 아니잖아.”

현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만약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다면, 찾아보려고!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려고.”

하온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늘 이유를 먼저 찾아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유가 없다면 멈추는 쪽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달랐다.

이유가 없어도 달렸고,

모른다면 알 때까지 달리겠다고 했다.

가볍게 말했지만, 그 안엔 내가 감히 꺼내본 적 없는 자유와 힘이 있었다.

불쾌함 속에서 이상하게,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조금 무례해보기로 했다.

“넌... 꿈이 뭐야?”

현은 눈을 크게 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꿈... 오랜만에 듣는다. 내... 꿈이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정했어. 지금!”

“지... 지금요?”

“그래! 지금! 내 꿈은—— 오늘 하루 행복하기.”

하온은 숨이 막히는 듯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가벼움 속에 진지함이 겹쳐 있었다.

현의 세계는 낯설고, 무례했고, 그래서 자꾸 흔들렸다.

---

집으로 돌아온 하온은 씻은 뒤 이불 위에 몸을 던졌다.

익숙한 방 안,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머릿속에서 현의 말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 어둡던 방 안에 선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고요히 웃으며, 하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온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오늘 하루 종일 어디 있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늘 장난만 치던 선월이 오늘은 조금 달라 보였다.

눈빛에 묘한 슬픔이 스쳤다.

“익숙해지셔야 할 거예요. 제가 없는 삶에.”

하온의 가슴이 순간 내려앉았다.

그 말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대답보다도 선명하게,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선월의 목소리가 방 안을 천천히 울렸다.

하온은 그 말의 무게를 애써 흘려보내듯, 고개를 돌렸다.

“오늘 신기한 사람을 만났어요. 들어볼래요?”

하온은 더욱더 아무렇지 않게 선월을 대했다.

선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한번. 궁금하네요. 당신과 그 사람의 이야기.”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치 누군가의 초대장을 받아 든 것처럼,

하온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정말 무례하지 않아요?”

“그래서 , 그 사람이 꿈이 뭔데요? 나도 궁금하네요!”

“... 선월은... 꿈이 뭐예요?”

하온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떨려 있었다.

늘 선월에게서 질문만 받아왔는데,

이제는 처음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방 안이 고요해졌다.

선월은 곧 대답할 것처럼 입술을 떼다가도,

다시 잠시 눈을 감았다.

하온은 그 짧은 침묵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제 꿈은요...”

천천히 말을 잇는 선월의 목소리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들렸다.

“오늘 하루 행복하기.”

하온은 숨을 고르지 못한 채 선월을 바라보았다.

순간, 현의 웃음과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낯선 현실과 상상의 울타리가 같은 말을 내놓는 순간.

“행복하기라니...”

하온은 힘없이 웃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게... 꿈이 될 수 있어요?”

선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꿈이니까요. 하루하루를 허투루 쓰고 싶지 않으니까.”

하온의 가슴이 저릿하게 조여 왔다.

현의 자유로움이, 선월의 고요함이,

모두 같은 자리에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하온은 이유를 찾아 헤맸다.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하지만 결국 붙잡고 싶었던 건, 단순한 한 마디.

‘오늘 하루 행복하기.’

그 말이, 오늘 내내 숨보다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선월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답에 가까워지는 당신을 보면서 기뻐해야 하는데... 조금 질투가 나네요.”

하온이 눈을 크게 떴다.

“제자의 성장을 질투하는 스승이 어디 있어요!”

“질투라...” 선월이 낮게 웃었다.

“그래요, 이건 질투예요. 당신이 찾으려는 행복에... 내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질투.”

하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행복이라는 말보다 더 무겁게 남은 건, 선월의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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