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불행한 것은 다른 것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핍감은 집착을 만든다. 정말 불행한 것은 다른 것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을 보고 느낄 여지를 없앤다. 어린 시절 엄마가 집에 없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되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이미 ‘엄마’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모든 일은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가 기준이 되었다. 모든 것이 이 기준에 따라서 해석이 되니 항상 위축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없고 친구들은 엄마가 있었다. 이 말은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이들은 모든 것을 가졌다는 뜻이다.
집단상담은 보통 1박 2일 또는 2박 3일간 열린다. 처음 참석한 집단상담 두 번째 날 여름이라는 별칭을 사용하는 20대 후반 여자 선생님을 만났다. 첫째로서 동생을 챙기며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은 애처롭게 바라보고 공감을 해주었다.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있는데 힘들었다며 눈물을 흘리는 여름 선생님이 괜히 밉기까지 했다. 참다 보니 화가 점점 커졌다. 그게 뭐가 슬프냐고, 엄마가 있는데 뭐가 슬프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은 엄마가 있고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애환을 딱 한 가지 기준으로 나눌 수는 없는 일인데 나의 기준은 분명했다. 나는 엄마가 있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친구 집에 들렀을 때 친구 엄마가 신발을 내어주며 잘 다녀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말할 수없이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내가 초라하다는 증거들을 수 없이 만들 수 있었다. 이른바 비합리적 신념으로 나는 초라하다는 신념을 만들었다. 이런 게 프레임의 후유증이다.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집착하게 된다. 집착은 균형을 잃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그런 지점이 있기 마련이고 성장해 가며 점차 균형을 찾게 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 결핍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어릴수록 자신을 지킬 힘이 없으므로 불안은 생존과 직결된다. 그때 느낀 감정은 좀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게 되는 이유는 생명을 유지하는 뇌의 부위인 뇌간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아동기 부적 경험(ACE) 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유이다.
공감 교실 워크숍에서 사례 발표 시간이었다. 경희 선생님은 대구에서 근무하는 초등 교사이다. 반 아이 중에 자신처럼 동생을 챙기는 아이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2학년 담임인 여름 샘은 9살인 은희를 보면 애처롭다고 했다. 자신도 어린데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동생과 아침밥을 같이 챙겨 먹고 등교를 한다고 했다.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의 숙제를 봐주는 은희를 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고 한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유난히 마음이 가는 아이들이 있다. 때론 부러운 눈으로, 때론 안쓰러운 마음이 한가득 담아진다. 아이들을 보면서 선생님도 성장한다. 이제 그런 은희를 보면서 대견하다,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