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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감자 넝쿨 같은 마음

끝없는 손님들을 두고 운행을 마친다.

by 제롬

어느 날 시골집에 가서 돼지감자를 캐게 되었다. 돼지감자 줄기 하나를 잡아 당기면 된다고 해서 따라 해 보았다. 돼지감자 넝쿨에 달려 있는 수많은 돼지감자가 따라 올라왔다. 잡아당기면 당길수록 수두룩 딸려 올라왔다.


꼭 지금의 내 마음 같다.




보라돌이 상담사에게 '나는 몇 번이면 될 것 같아요. 대신 나를 이해해 주세요. 저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지만 보라돌이는 '정말요?'라고 반문을 했다.


나는 정말로 몇 번의 슬펐던 기억, 몇 번의 외로웠던 기억을 따뜻하게 이해받으면 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공허한 마음이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보라돌이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내가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슬퍼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해보기로 했다. 더 이상 일상을 보내며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버스의 운전대를 잡으며 몇 명의 손님이면 될 줄 알았다. 몇 번의 사건에 엮긴 나의 어린 시절을 소환하고 푹 알아주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끝도 없이 기억이 났고 이해받지 못한 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돼지감자 넝쿨처럼...


결국 나는 보라돌이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대신 채워줄 수 없다'라고 말한 이유를... 그건 다른 사람이 해준다고 해소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 마음을 타인이 알아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만 그 마음들이 몇 번이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순간들이 계속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번이면 된다는 내 말은 착각이 맞았다. 나는 몰랐지만 보라돌이는 알고 있었다. 과거를 모두 이해해 준다는 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운전하면서 마주해야 하는 것은 결핍된 내 마음들만이 아니었다. 이 마음들을 마주하고 내가 바라봐야 할 것은 지금 여기의 마음이었다. 과거의 나를 채워준다는 것은 자세의 문제이지 사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하나 다 채워주고 이해해 주고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세를 갖는 것이었다. 내가 책임지고 마주하려는 자세가 필요했다.


내가 내 마음을 마주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은 이미 다음 단계로 가고 있었다. 이제야 더 꺼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버스도 마지막 운행을 할 때가 되었다.




운전사 : 여행이 늘 그렇듯, 이제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아쉬워지네.. 어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마음들 : 음... 항상 같은 순간들이 생각났었던 것 같아. 어릴 적 살던 집이나 동네 언저리... 오늘은 그곳들을 한 번에 바라볼 수 있는 큰 버드나무 위로 가 볼까?


운전사 : 좋지~.. 옛날 시골은 마을 입구에 큰 나무가 있어서 정겨운 것 같아. 우리 마을에도 있었잖아. 느티나무가 아주 컸지. 거기로 가 보자.


마음들 : 뭔가 마음이 좀 서운해요. 마지막 운행이라고 하니까...


운전사 : 그렇지? 나도 그래... 처음엔 운전대 잡기도 부담스러웠는데... 이제 너무 자연스러워졌어. 만나기 어려운 파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주인으로 이 운전대를 잡았다는 거지. 그건 흔들림이 없어...


마음들 : 그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의미가 있죠. 이제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허전하고 슬퍼하는 과정을 더 이상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거잖아요. 혼자 했던 그 많은 순간들을 이제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는 거.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운전사 : 그래, 맞아... 좋은 사람을 만나면 속으로 기대가 생기고 친해질수록 더 외로워지는 마음을 이제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이제 정말 접었거든.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거였으니까.


마음들 : 상상만 해도 좋아요. 세상 사는 게 너무 편하고 자유로울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거잖아. 이해받기 위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애써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운전사 : 생각만으로도 자유롭지? 나도 그래.. 아직 서툴지만 우리가 부둥켜안고 뒹굴더라도 이제 우리가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지. 오래 걸렸다.. 그렇지?


마음들 : 어, 정말 오래 걸렸어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정말 몰랐어요. 진짜... 아무도 몰랐을 걸...


운전사 : 그래..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몰랐지...


마음들 : 그래도 이제라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야.. 죽기 전에 한 번은 경험하고 죽잖아... ㅎㅎ 이런 걸 보라돌이는 성장이라고 말할 것 같아.. 메아리가 들려오는 듯해...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라고...


운전사 : 나는 내가 파트인지 셀프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운전하는 건 참 좋았어. 삐걱 대더라도 내 삶을 우리가 책임진다는 마음이 참 좋았어. 너희들에게도 고마워. 그리고, 천천히 만나 가야 할 마음들이 있다면 함께 만나가 보자...


나의 마음들아, 나의 시간들아, 나의 경험들아... 모두 함께 가보자!




끝없는 손님들을 두고 나는 운행을 마친다. 끝없기도 하고 이제 시작이기도 하다.

인생의 고갯길이 있다면 한 고개를 넘어갔다. 또 다른 고개가 기다리고 있지만 예전처럼 막막하거나 돌아가고 싶거나 그러진 않는다.


론 커츠의 '나의 치료의 목적은 내담자가 삶의 모든 곳은 축복이자 고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나는 이제 삶에 놓은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넘어가지 못할 언덕 같았지만 그 고개를 운동부족이고 걷기도 싫어하는 내가 걸었고 결국 넘어갔다.


여전히 잘했다는 말을 보라돌이에게 듣고 싶긴 하지만, 내가 알아준다.

잘했다.. 잘했다...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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