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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롬 Oct 26. 2024

불신: 5%만 믿어 볼 수 있겠어요?

상담주제: 사람을 믿을 수 없어요.

새 학기 업무분장이 발표된 날이었다. 발표가 있기 전에 전화가 왔었다. 원하는 업무가 안될 것 같다고. 어떤 업무가 될 것 같은지 물으니 확정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대략적으로 말하지만 나는 그게 아무도 지원하지 않은 자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전화해 준 부장도 눈치가 빠르네라고 웃었다.

 

전화를 받은 몸의 긴장이 내려가지 않았다. 급기야 일어나다 허리가 안 펴져 한의원에 갔다. 어깨에 쌓인 긴장이 허리로 내려갔다고 한다. 돌처럼 굳어진 허리와 통증이 마음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한의원 치료를 마치고 개인상담을 신청했다. 그래도 요즘은 여러 곳에서 상담지원을 해주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전에는 모두 사비를 들여 상담을 받았었다. 교직원공제회로 연락을 해서 상담을 신청했다. 

 

첫회기 상담날이다. 


상담사: 어떤 마음을 작업하면 조금 더 생활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어떤 게 요즘 불편한가요?

나: 업무분장이 발표되고 긴장이 내려가지 않아요. 머리로는 못 할 일이 없는 걸 알고 다 할 수 있겠다는 것도 아는데 숨이 차고 어깨가 뭉치고 계속 긴장이 돼요.

 

상담사: 눈을 감고 그 느낌이 몸의 어디에서 느껴지는지 느껴보시겠어요?

나: 입술이 떨리고, 가슴이 조여와요.

 

상담사: 괜찮으면 그 느낌을 조금 더 느껴볼게요. 힘들면 눈을 떠도 되고 멈춰도 괜찮아요. 어떤 모습이 떠오른 게 있나요? 

나: 네, 쪼그리고 앉아서 마당에서 나무로 그림을 그리는 여자아이가 있어요.

 

상담사: 몇 살 정도로 보이나요? 

나: 5~6살 정도요.

 

상담사: 그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거기에 있나요? 무슨 생각을 하며 거기에 있나요?

나: 멍하니 그냥 그리고 있어요. 그냥 있어요. 생명력이 없어 보여요.

 

상담사: 그 아이는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있는 것 같은가요?

나: 그냥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 자포자기, 어떤 기대도 없어 보여요.(눈물이 났다)

 

상담사: 그렇군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있었군요. 그 아이를 보니 어떤 마음이 드나요? 지금의 선생님이 다가가 그 아이를 안아 줄 수 있나요? 

나: 안쓰러워요. 네 다가갈 수 있어요.

 

상담사: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반응하나요? 제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 마음으로 연결해 보려고 해요. 제가 가서 그 아이를 안아줘도 될까요?

나: 감정이 없어 보여요. 그 아이가 마음을 열까 봐 제가 걱정하고 있어요. 다가오는 손을 잡을까 봐 제가 걱정이 돼요.

 

상담사: 마음을 열까 봐 걱정을 하고 있군요. 기대하고 실망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군요.

나: 네. 그러면 정말 너무 힘들거든요. 기대하지 말라고 다가가지 말라고 제 마음이 그 아이에게 말하고 있어요.

 

상담사: 그렇군요. 그 아이는 지금의 선생님이기도 하네요. 너무 걱정이 되시는군요. 그 아이가 담담하게 있는데 그 아이가 마음을 울까 봐 걱정하는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네요. 그 아이가 믿었다가 필요할 때 도와주지 않아서 더 절망할까 봐 걱정하는군요. 그 아이를 정말 잘 지켜주시고 싶으신 거네요. 

나: (눈물)

 

상담사: 선생님. 5%만 믿어보면 어떨까요? 5% 정도는 제가 도와줄 수 있다는 걸 믿어지시나요?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믿어보시면 어떨까요?

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네, 5% 정도면 믿을 수 있겠어요.

 

상담사: 네.. 5% 정도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믿으시네요. 네 좋아요. 지금 몸에서 변화가 있다면 자각해 보시겠어요. 5% 정도 조금만 더 믿어보는 걸 해보기로 했어요. 몸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나: 왼쪽 팔과 머리가 시원해졌어요. 조금 더 가슴은 가벼워졌어요. 입술의 떨림도 조금 나아졌어요.

 

나는 그렇게 첫회기를 마치고 잠을 잤다. 온몸의 맥이 풀리고 열감도 느껴졌다. 잠을 자고 나도 회복이 안된 것 같았다. 다음 상담까지 5% 정도 조금씩 믿기로 했을 때 몸의 감각을 기억하며 지내보라고 상담사는 말했다. 5%가 머리를 맴돌았다. 이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누군가를 의지하거나 인생 특공대라는 각오는 좀 내려놓아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해 보면, 그 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 시절에도 나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 옆집아줌마는 밥도 못 챙겨 먹고 있을까 봐 단무지를 고춧가루와 양념으로 버무린 반찬을 우리 집에 가져왔다. 그리고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자주 들여다봐야 하는데 미안하다, 내가 살길이 바빠서’라고 말했다. 나는 그 단무지무침을 가져다준 아줌마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괜찮다고 말했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나를 살려주길 바라는 절박한 마음에서 조금 더 내 마음의 곁을 주지 않았다. 모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온 다는 듯이. 나에게 말도 없이 허락도 없이 날 두고 집을 나간 엄마, 나에게 허락도 없이 여행이라고 말하며 이민을 간 할머니. 나의 경험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것이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고 하듯이 나의 기대로 인한 실망과 좌절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 5%

괜찮다. 


나를 도와준 사람들을 느끼고 도움을 요청할 지금의 나를 느끼며 조금 더 마음을 내어보자. 안전하게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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