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주제: 죄책감
내가 착해진 이유가 있다. 아니 내가 착한 척하며 살았던 이유가 있다. 엄마와 헤어지고 난 후 할머니가 계신 집에 도착하면 나는 세상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은 먹지고 웃지도 놀지도 못한다. 누워있거나 마당에 앉아 혼자 낙서를 했다. 그러다 점점 나아지면 밥을 먹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할머니도 참 힘들고 안쓰러웠겠지만 나는 할머니의 마음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내가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원해도 엄마는 오지 않고 나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받아들이고 나면서 밥을 먹게 된다. 참 희한한 것은 내가 엄마와 헤어진 이유가 엄마의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 내가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정리된다는 거다. 내 탓이다. 그것 말고 엄마를 탓할 수도 세상을 탓할 수도 없는 어린아이는 그렇게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방학 때마다 엄마와 헤어지는 경험은 나에게 두려움을 더 크게 만들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하고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렇게 죄책감으로 정리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가슴이 찢기는 기분이다. 너무 아파서 가슴 안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반복적으로 이 두 가지 감정을 느껴야 했다.
엄마와의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버둥 친 것도 내가 만날 죄책감을 무의식은 알고 있어서 일지 모르겠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면 엄마와 이렇게 헤어져야 할까, 엄마는 나를 키우지 않을까. 나는 왜 태어나서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거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나마 정리를 해야 그나마 이해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엄마처럼 곁에 있어주던 할머니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별을 하게 되었다. 큰아버지가 계신 미국으로 할머니가 이민을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선교사로 있던 큰아버지는 더 이상 할머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희 집은 너희가 알아서 살아가야 할 때라는 가혹한 판단을 했다. 엄마와 헤어지는 게 얼마나 나에게 힘든 것인지를 경험했던 나는 할머니와의 이별이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 정말 이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렇게 몇 개월을 기도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할머니가 떠난 날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내가 너무 다행스러워 기뻤다. 내가 해냈다고 생각했다.
이 후로도 내가 가진 문제를 알지 못했다. 지인의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오래도록 같이 공부한 샘이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볼 것 같아서 슬픈 것처럼 걱정되는 것처럼 했다. 정작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 지지 않는다. 이제 나이가 많아지다 보니 지인들의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부고소식을 듣게 된다. 내가 느끼는 무의 상태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찾아진 이유들이다. 어린 나는 이별을 감당할 수 없었다. 여러 번의 잦은 이별과 영원한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어짐에 힘들어하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느끼지 않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으니까 아무도 못 찾게 숨겨두었다. 지금은 나도 못 찾고 있다.
죄책감은 내 잘못이라는 감정이다. 애착장애의 대가 보울비는 어린아이들이 불안한 환경에서 갖는 불안은 생존불안이라고 한다. 혼자서 살 수 없는 상태에서 겪는 불안은 생존과 관련된 것이다. 생존은 본능이라 본능의 습관이 남게 된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사건이 생겼을 때 생존본능이 발동하는 것이다.
사소한 아이들의 일에 사생결단의 태도로 전화를 거는 학부모가 있다. 정말 그 부모님은 죽고 사는 문제로 여기는 것 같다. 자신의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은 있는 그대로 표현되면 좋으련만 대개는 선생님을 탓하는 말로 표현이 된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내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의 상처를 내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가만히 상대를 비춰주는 거울이면 된다. 그런 여유가 필요하다.
존재 자체로 너는 사랑받을 만해라는 흔하고 당연한 그 말이 가슴으로 느껴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존재로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데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더 잘하는 것으로 나의 존재가 가치 있는 만들어 왔다. 내가 더 유용한 인간임을 증명하며 열심히 해왔다. 그러다 보니 가치 있고 유용하지 않은 것들에는 무감각해진다.
하마터면 열심히 할 뻔했다는 책 제목처럼 나는 하마터면 착하게 굴 뻔했다는 말을 한다. 내 마음에서 자동반사로 나가는 행동들 마음들을 계속 점검한다. 네가 정말 좋아서 하는 거야, 네가 정말 원하는 거야라고 묻는다. 처음에 나도 잘 모르겠었다. 지금도 알아가고 싶다. 우선 열심히 하는 나, 착한 나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착한 선생님으로 순응하는 것보다 나는 더 자유로운 것을 좋아했고 무용하지만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제라도 나는 착한 선생님으로 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계속 말해준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못해도 나는 너를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