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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노아 Jul 04. 2024

맑은 영혼을 찾아서 -진정한 순수함의 의미

도전자들의 이야기

맑다....라는 이 두 글자에 대해 깊이 고찰해 본다.

잡스럽고 탁한 것이 없는 상태라고 사전에 적혀 있다. 이 말인 즉 슨, 잡스럽거나 탁한 것이 있으면 맑음의 순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나는 어떠할까.... 또 어떤 이들이 이렇게 순도 높은 삶을 사는 것일까.


어느 특정인을 접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느끼는 그에 대한 분위기, 그 사람을 대변할 수 있는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다. ‘차갑다’, ‘따뜻하다’, ‘가볍다’, ‘진중하다’, ‘거칠다’, ‘신중하다’, 그리고 ‘맑다’, ‘혼탁하다’ 등등. 그런데 그 특정인에 대한 표현은 대체로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미지화되어 버린다. 그리곤 ‘가벼운 사람’, ‘진중한 사람’, ‘사기꾼 같은 사람’, ‘믿을만한 사람’, ‘맑은 영혼의 사람’ 등으로 그 이미지의 형용사가 그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름 외에 자신을 나타내는 단어, 표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붙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맑은 영혼의 사람’은 어떻게 붙여지는 것일까? 착하고, 순진하고, 청순하고, 바보 같은 그리고, 그림을 그려내고, 글로 표현하고 말로 전달하는 것들에 때가 묻지 않은 느낌을 주는 사람을 칭하는 듯한데, 다소 관념적인 이해인 듯하다. 사람에 대해선 보편적 이해의 수준은 있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기에 ‘착한’, ‘순진한’, ‘청순한’이란 표현으로 ‘맑은 영혼’을 설명하기엔 부족한 듯하다.


‘맑은 영혼’에 대해 가장 와닿는 정의는 브런치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김주원 교수의 ‘인식, 관념에서 탈피한 영혼’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이란 길을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그것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또는 버리고 그렇게 내게 남겨진 것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담아 둔 정보의 양, 지식의 양, 사고의 깊이와 태어날 때부터 가져온 잠재력으로 집중 영역이 달라지고, 집중영역 안에서도 미세하게 체계가 형성되고 그 체계 안에서 다양한 채도와 명도가 채색되는 것이다.


누구나 다 하는 신체와 감각 활동이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파편으로 주입되지만 이 파편들이 서로 연결되어 조각이 되고 조각이 하나의 모양새를 갖춰나가는 것은 이러한 사고의 체계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이렇게 맞춰진 자신만의 세계가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구분되고 분리되고 분절되기도 하며 전체에 아우러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감각으로 주입되어 형성된 인식이 자신을 가두지 않고 의식으로 확장되면서 자기 색을 갖지만 세상과 유연하게 유동하는, 온전히 자신만의 채색을 갖추지만, 세상과 자연스레 연동되는 그런 것이 맑은 영혼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인식은 유성물감. 맑은 영혼은 순백의 도화지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리다가 수정해야 하는데 유성으로 칠해놓으면 그 위에 덧칠을 해야 한다. 지울 수 없이 고착된 유성물감이 나의 인식이라면 곤란하지 않을까? 그러니 인식에 덧대어 이색저색 계속 색이 혼탁해지고 두터워지고 뻑뻑해지고. 애초의 순백의 도화지에 칠했던 그 순수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그렇다면 맑은 영혼이란 덧칠을 없앤, 애초의 순백의 도화지. 그리고 그 위에 언제라도 지워질 수 있는 여유와 자유.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순백의 캔버스처럼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의미를 지닌 여러 순백의 물감들이 칠해져 뚜렷한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그런 영혼…


나이가 들수록 주변에서 ‘맑은 영혼’을 느끼기도 어렵고 그런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물론 나 또한 지금껏 이 표현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내가 느끼듯이 남도 나에게서 ‘맑은’이라는 형용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맑은 영혼’을 붙여도 되는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살아갈수록, 알면 알수록 ‘맑은 영혼’을 사용하기가 왜 불편한 것일까? 내 영혼이 맑지 않아서 그런가? 니체의 말대로  '우리가 먼저 영혼을 찾아내지 않으면 우리는 맑은 영혼을 꿰뚤어보지 못한다.(주 1)'더니 내가 맑지 않아서 맑은 영혼을 못 찾은 것인지, 지금 내게 맑은 영혼이 보인다는 것은 나 역시 내 인식이 거둬지고 맑아지는 중인 것인지.  




최근에 오래된 대학 친구들, 회사 동료들, 외부 사업가 등 각 다른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상당히 많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아는 것이 많은 듯,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도 여럿 되었다. 중견 자산가도 있고 부를 얻기 위해 늦은 나이에도 고군분투하는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참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공한 사람이던, 성공 중에 있는 사람이던, 성공하고픈 사람이던, 이들 모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진중함이 있고, 성실함이 있고, 의지가 있고, 결연함도 있고, 여유도 있으며, 긍정의 마인드도 있다. 삶에 대해, 지식에 대해, 정보에 대해, 부에 대해선 진지함을 넘어 전투적이다. 물론 남은 생에 대해선 대체로 너그러운 입장으로 치열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들 어느 누구에게도 맑은 영혼의 느낌을 느끼지 못했다. 묘사를 하자면, 캔버스에 그림은 그려졌으나 웬만한 색상으로 채워져 있고, 그림의 윤곽은 보이나 탁한 색상으로 무거워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일부는 어두운 느낌이 압도하여 기분마저 언짢은 그림도 있었다.


충분히 성취한 세대인 듯한데 여전히 정신적인 영역보다는 물질적인 영역에 관심이 많고,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에 감각이 발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더 잘살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총론에는 한결같이 공감을 하는데 각론에서는 각자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그것을 만들어 가는 방법이 다름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악에 물들었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진 않는다. 그러나 들이 풍겨내는 기운과 분위기는 ‘맑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대학 친구들과 하루를 같이 보낸 적이 있다. 근 20년 만의 만남이라 과거의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반가움의 감정 더 컸기에 호기심의 마음으로 서로의 얘기에 관심을 가졌다. 성장의 모습이 달랐고 그 성취의 결과가 달라, 그 과정들이 궁금하여 얘기를 많이 나누었다. 온라인 회사, 투자 회사, 농장 운영, 중소기업 등 다양한 역할로 사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충분히 성공한 모습에 순간 놀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얘기가 깊어지면서 공통적으로 와닿는 것이 있었다. 이들의 보여진 모습에 가려진 내면은 그리 맑지는 않았다. 이들 또한 악하거나 해롭지 않지만 마음을 열고 나눌 수 있는 맑은 영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꽤 오랜 기간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맑은 영혼을 느끼기가 왜 쉽지 않을까? 아는 것이 많은 것, 경험한 것이 많은 것, 가진 것이 많은 것이 방해 요인일까? 이것들을 통해 만들어진 인식과 관념이 강해져 그런 것일까? 무거워 보이고, 어두워 보이고, 혼탁해 보이는 느낌은 어떻게 본연의 맑은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가능할까?


요즘 맑은 영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영혼이 맑다는 표현을 많이, 자주 사용하고 싶다. 그런 사람을 자주 만나고 싶다. 나의 영혼도 맑지 않음에 언젠가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는 얘기를 듣고 싶다. 내가 부족함을 알고, 타인의 모습을 통해 깨우쳐 가면서 맑음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 듦에 더 필요한 것이 맑은 영혼이다. 삶의 순간순간들이 모여 존재자체가 기여가 되는 영원을 누리고 싶다. 


아침 독서 모임 좌장의 얘기가 나에게 자극을 많이 주었다. 맑은 영혼은 인식, 관념에서 탈피한 영혼이라고. 탈피란 내려놓거나 벗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뱀처럼 지혜롭게 (주 2). 그리고 아는 것이 곧 사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고. 그렇게 맑은 영혼으로 조금씩 나아가 누군가의 삶에 있는 얼룩을 지워줄 수 있어야 한다고.


소로우가 '터무니없는 엉뚱함'(주 3)이라고 표현한 의미가 맑은 영혼을 대변하지 않을까? 그가 표현한 '막 깨어나는 순간에 있는 사람', '진실한 표현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아무런 과장도 하지 않는 사람' '다소 터무니없는 엉뚱한 표현이라도 어떻게 들릴까 걱정하지 않는 사람', '이랴! 워워~'같이 동물들까지도 알아듣는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라 할지라도 일상의 좁은 한계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아닐까?  



(주 1) 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21, 책세상

(주 2) 네빌고다드, 부활, 2009, 서른세 개의 계단

사람들은 뱀이 자신의 일부분을 단단한 껍데기로 만들고 그것보다 몸집이 커져 껍데기를 던져버리는 행동 때문에, 뱀을 '끝없는 성장'과 '스스로 다시 태어나는 힘'의 상징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뱀처럼 지헤롭게 되어서 자신의 껍데기, 즉 자신의 환경-자신의 단단한 자아-을 던져버리는 방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그를 풀어주어 그가 가게끔 하는" 방법을,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방법을, 옛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지만 뱀이 자신의 낡은 껍데기를 벗어버렸을 때 죽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이전의 관념을 던져버린 자신도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 3) 헨리데이비드소로우, 월든, 2011,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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