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글이 되다 II
합리화(合理化)와 합리적(合理的)은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무척 다르다. ~~ 화는 능동적인 행위, 부정적인 면이 있는 사건을 긍정적으로 포장하려고 하는 행동으로, 감정적 상처나 실망거리를 회피하기 위해 구실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것을 저렇게 바꾸려는 의도를 지녔기에 심리 기제를 포함한 의미를 갖고 있고, ~~ 적은 수동적으로 이미 그러한 성질을 함축한 것이고, 논리나 이치에 합당한, 또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두 단어의 의미는 반대의 성질을 갖고 있다.
일상에서 종종 듣는 단어가 ‘합리적인 사람’이다. 오랜 회사 생활에서도 선배, 동료, 후배들이 나에 대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단어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말을 하기보다는 맥락을 이해하는 경청을 우선하고, 주장과 요구하기보다는 대화와 협업을 우선하고, 곧아서 부러지기보다는 유연하여 휘어지더라도 회복탄력성이 높다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조직 환경, 조직 DNA와 잘 맞는 특성이다. 이 때문인지 두루두루 network이 만들어지고 합리적이라는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형성된 연유인지 조직생활을 꽤 오래 했다. 하여, 자신을 꽤 합리적인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고 나를 아는 타인도 그렇게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한 켠에서는 이와는 다른 모습인 합리화기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이 기제가 나타난다. 종종 겪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그 사람을 실망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상황에서 헤아림 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담긴 사과를 한다면 실망이 믿음으로 바뀔 수 있는데, 엉뚱하게도 그렇게 된 상황부터 먼저 설명을 한다.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진심 어린 사과와 마음이 담긴 미안함을 얘기해야 하는데, 궁지렁 궁지렁 사건이 발생한 배경과 사유에 대해서 얘기를 늘어놓는다. ‘어찌할 수 없었어’, ‘그럴만한 상황이었어’, ‘그런 뜻이 아니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등의 문장들이다. 사과와 미안하다는 마음의 표현보다, 상대방의 이해와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려는 행위, 그리고 그 행위를 나타내는 문장들이 변명이거나 합리화이다. 장황스러운 합리화를 듣고 있는 가까운 사람의 마음속은 타 들어간다. 나는 당연히 얘기할 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하고 내뱉는 말이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냥 합리화이다. 더욱이 합리화는 자신의 입장, 자신의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한 얄팍한 행위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와중에 가까운 사람의 속은 숯덩이가 되어 간다.
조직생활에서는 합리적인 사람이 왜 가까운 사람에겐 합리화의 사람이 되는가? 반대 성질의 것이 나타나는 것은 왜일까? 해리성 장애와 같은 이중인격은 아닌 듯한데…
합리화는 에고(자아, ego)와 깊은 연관이 있다. 어떤 행동을 한 이후에 발생하는 죄책감이나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 자아(ego)가 자신의 행동을 포장할 때 나타나는 것이 합리화이고 정확히 표현하면 합리화기제이다. 알량한 자존심 지키기, 책임회피, 현실도피를 하려 할 때 나타난다.
종종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변명과 합리화로 일을 망치곤 한다. 부족함을 인정하거나, 잘못을 인정해야 할 때 자존심이 작용하여 합리화기제를 불러낸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기만으로 굳어진다. 알량한 자존심 지키기에 이어서 스스로 그래도 괜찮다는 기만, 내가 상대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는 기만으로 이어진다.
“시간 약속을 못 지켜? 늦을 것 같으면 기다리는 사람을 배려하여 미리 귀띔을 하는 게 맞잖아? 그리고 늦게 와서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엉뚱한 얘기를 해? 사과가 먼저 아니야?’
“일부러 늦은 게 아니야. 미팅이 일정대로 끝나지 않아서 그랬어. 그래도 빠르게 온 거야.”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해 주길 기다리며 늦게 온 행위에 대해 얘기를 이어간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사과해야 한다는 중요한 것은 잊은 채, 늦게 온 이유에 대해서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사과의 한마디를 듣지 못한 채, 변명만 들어야 하니 화는 커지고 목소리도 높아진다. 늦게 온 이는 이렇게 이어간다.
“일하다가 늦은 거야. 이 정도도 이해 못 해줘.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렸지만, 약속을 지키려고 미팅도 마무리 못한 채 서둘러 나왔는데 너무 한 거 아니야?”
해야 할 사과의 한마디는 잊은 채, 이해를 못 해주는 상황에 꽂혀 급기야는 상대방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적반하장의 상황이 된다. 미리 와서 기다린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소통이 안 되는 상대방에게서 벽을 느낀다. 변명의 강도가 높아지다가 대화는 끊어지고 관계는 어색해진다. 그리곤 ‘열심히 일하다 보니 늦을 수도 있지. 힘들게 일하고도 약속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했기에 이해를 못 해주는 저 사람이 문제야.’라고 합리화한다.
이러한 합리화는 평범한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정치나 학계에서도 일어난다. 득정 분야의 권위자나 해당 업적으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은 학자가 자신의 업적을 지적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거나, 태도가 불량하거나 라이벌인 경우, 비록 지적하는 사람의 애기가 맞더라도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자기가 옳음을 고수하고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는 경우도 예가 된다. 이처럼 자존심 때문에 발동하는 합리화는 대체로 감정대립으로 이어지고 끝이 좋지 않다.
회사생활에서 책임회피 합리화를 자주 본다. 성과는 자기 몫이고,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을 배제시키는 부류들에 붙어 있는 기제이다. 이들은 리스크 지는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 리스크를 지더라도 의사결정을 해야 할 과제는 책임귀책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고 승인한다. 이런 자기 방어 장치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 결과,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을 물을 대상부터 찾는다. 의연하게 책임을 지거나 개선을 위한 노력을 얘기하기보다는 책임회피에 급급, 부하까지 희생시키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관념 속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 못한 채, 책임 회피가 오히려 당당해진다. 그리곤 또 사건이 발생할 때, 유사한 과정을 반복한다. 합리화의 무서운 이면이다.
현실 도피는 어떤가?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 자기 합리화를 하며 도피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합리화를 선택하게 된다. ‘담배 피우는 건 신체 건강에는 좋지 않아도 정신 건강에는 좋지’ 혹은 ‘담배 피우면서 스트레스 해소하는 것이 차라리 더 오래 산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책임도 무거워지는 거니 승진을 못해도 지금처럼 편하고 쉽게 일하면서 즐겁게 사는 게 낫다.’ 등의 회피 합리화를 선택하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 나는 자주 합리화한다. ‘잠을 푹, 오래 자는 게 오히려 건강에 좋다고 하니, 새벽에 힘들게 일어나기보다는 수면을 더 하는 게 낫다.’라고..
가끔은 합리화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도 한다. ‘합리화는 내가 죄의식이나 자책감에서 벗어나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한 마음 작용이다’라고.. 그러나 너무 합리화가 심하면 개인생활,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해나가지 못함도 알기에 안 하려 노력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을 대상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죄질이 나쁘기에.. 비록 관계가 겉으로 원만하다 하더라도 합리화의 후유증은 심각하고 대화 단절, 관계 단절로 이어질 수도 있음도 생각한다.
합리화는 스스로 치는 덫이다. 이 덫에서 벗어나려면 자각하고, 자각하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행동, 행위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세밀히 알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이 노력은 에고를 줄이려는 노력이고, 자존심을 없애는 노력이고, 유연하려는 노력이다. 합리화를 없애고 어디든, 누구에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합리적인 모습이 내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