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글이 되다 II
과학은 자연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과학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섭리를 발견해 내는 과정이다. 자연의 오묘함에 놀라지만 무한의 깊이에 숙연해진다. 지금의 과학이 이해한 자연의 섭리는 분명 극히 일부분 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겨우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치는 것도 자연의 섭리이기에 그 섭리의 깊이도 가늠이 안된다. 자연의 원리, 자연의 힘, 자연의 에너지, 자연의 역할, 그리고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이 가진 신비함에서 우리 생각의 경계 밖에 있는 거대한 존재에 대해 믿음이 생긴다.
인간의 신체 구조, 원리만 보더라도 우리의 이해는 한 모퉁이를 보는 수준이다. 뇌, 심장, 혈관, 근육, 뼈 등 부문 부문에 대해 알지만 각각이 가진 역할은 물론, 연결의 원리와 구조의 신비로움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이 많기에 죽음을 넘어설 수 없고, 해결하지 못하는 신체의 비밀 앞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자연의 작은 일부인 신체의 오묘함 조차도 결코 인간이 점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주는 또 어떠한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 끝이 어디일까? 왜 생겼을까? 상상하기에도 힘겨운 광활한 우주는 무엇일까? 그 우주가 가지고 있는 힘은 원리는 무엇일까? 이 우주에는 태양계와 같은 행성이 몇억 개씩 존재한다지 않는가…… 이 거대한 것들을 탄생시키고 보이지 않는 기운, 원리로 존재하여 만물을 움직이는, 상상조차 불가한 그 존재는 무엇인가?
이 거대한 공간에서 가늠이 안 되는 존재에 의해 살고 있는 나는 무엇인지? 거대한 존재의 시각에서는 나는 무엇인지? 불현듯, 우주의 원리는 모든 것을 정해두고 상상도 불가한 틀에서 만물을 움직이는 듯하고, 삶, 죽음, 태어남도 정해져 있어, 깨닫지는 못하지만, 다시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궁극에는 정해져 있는 원리대로 간다. 잘되는 것도, 못 되는 것도 이미 우주의 기운에서 정해져 있기에 어떤 결과이든 그 틀에서 짜인 대로 움직인다. 누가, 어떤, 로직으로 짠 것인지 모르지만 나의 모든 것이 대본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계속하면 내 삶은 이미 정해진 여정이다. 지금 이 시간에 이 글을 쓰는 것도 이미 정해진 여정이지 않을까? '운명론자'냐고 내게 누군가가 묻는다면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왔기에 운명론자인지 아닌지 나조차도 모른다. 지금 날 지나가고 있는 생각들이 '운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면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또한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 날 아주 무겁게 짓누르는 생각을 여과 없이 뱉어내 굳이 따지고 묻는다면 '운명',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해야 할 어떤 결과까지는 정해져 있지 않을까라는 쪽으로 내 생각은 기울고 있다.
만약에 내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다면, 돌고 도는 수레바퀴처럼 우주의 원리에 의한 윤회에 따라 이번 생에서는 이만큼, 다음 생에서는 또 저만큼, 그다음 생에서는 또 그에 주어진 만큼 난 살다가 떠나겠지. 지금 생에서 나은 모습으로 있는 존재들은 이미 그 이전의 생들에서 과정을 거쳤다. 윤회의 시작점이 다를 뿐이지, 전체 여정은 같으니 어떤 존재는 최고의 생, 어떤 존재는 최악의 생, 어떤 존재는 중간의 생에 머물고 있는 것이고 그 여정에서 생을 다하면 다음 생의 순서로 넘어가겠지.
내가 지금 최고의 생에 있다면, 분명 그런 시간이 온다. 아무리 거부해도 주어지고, 아무리 피하려 해도 그런 시간은 주어진다. 최고의 생을 즐기도록 그 여정으로 몰고 간다. 무엇을 해야 할지 불현듯 깨닫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답을 구하게 한다. 무일푼에서 가진 자로 변화되기도 하듯이. 반대로 최악의 생에 있다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론은 최악의 생에 머물게 된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최악의 여정은 이어진다. 자녀가 어려운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동생도 희귀병으로 고생을 한다. 자신도 어려움에 탄식을 하다가 헤어나지 못해 최악의 생에서 힘들어한다.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윤회의 큰 원에서 작은 한 부분을 최악의 생으로 보냈다면, 다음 여정에서는 좀 나은 생을 보내게 될 것이나 그 또한 틀 안에 정해져 있다.
범접할 수 없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 그 기운 속에서 나는 어느 여정에 있는 것일까? 최고의 생일까? 최악의 생일까? 아니면 최고의 선에 바통을 넘길 전단계 일까? 최악의 생에서 막 벗어나 달려야 하는 생일까? 분명 사고와 행위 주체는 나지만 나를 지휘하는 기운은 나를 어떤 여정으로 밀고, 끌고 가는 듯하다. 그렇게 내 생이 윤회에 있어 최고의 생이 아닌 어떤 단계의 생이 주어졌다고 한들 이 역시 내 생이니 난 나의 삶에서 최고의 삶을 만들면 될 것이다.
이렇게 여러 생의 여정이 있고, 그 여정은 정해진 틀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으로 내맡겨 버리면 짜인 대로 간다. 그러나 주어진 여정의 순서를 바꾸는 것도 우주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의 하나이니, 지금 그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여정을 운명, 생각과 사고를 자유의지라고 표현해 보자. 내가 이미 어떤 여정(운명)에 들어와 있지만, 나의 사고와 생각(자유의지)을 여정(운명)과 유기적으로 작용시켜 무한한 윤회의 고리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이 생애의 여정을 우주의 원리대로 순응하여 가야 하지만 하나의 우주를 이루는 자유의지와의 공존으로 창조적으로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원리는 바꿀 수 없다. 불면의 원리에 의해 내가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거시적 관점과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는 미시적 관점이 유기적으로 공존하면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듯이 운명과 자유의지의 유기적 공존으로 삶을 창조해 갈 수 있다고 본다.
이번 생이 어떤 생이든, 난 내 인생에 주어진 이 생을 선물처럼 귀하게 여기며 최고로 만들 의무가 있다. 나의 변화를 보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창조한다면 이번 여정은 최고의 생이고, 지금은 아니지만 그 시간은 필히 온다. ‘의식하고, 상상하며 감각으로 느껴 현실의 상으로 물질화된다’는 것과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 된다’는 의미와 맥을 같이 한다.
결국, 거대한 우주의 원리 속에 나의 여정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생각하고 그 여정이 나은 것이 되도록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상태를 관측하고, 상상하고, 감각으로 느끼면서 현실화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