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호접몽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퇴사하고 성급히 직장을 구하기보다는 이직을 하기까지 조금 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가족과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바닷가로 숙소를 정할까 하다 관광지만 돌아다닐 것 같아서 아예 한라산 자락에 있는 외딴 마을에 한 달 살 집을 예약했다. 주변에 오름들이 지척에 있어 가볍게 등산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있었다. 사실 처음 1주일은 13년 간 몸 담았던 직장을 그만둔 후폭풍이 아직 가시지 않아 마음속이 어지러웠다. 그래도 제주에 왔으니 아들놈한테 유명한 장소는 좀 보여 줘야 할 것 같아 이곳저곳 이름난 관광지를 돌아다녔는데 머릿속엔 지금 이렇게 손 놓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아내는 도무지 집중을 못하는 나에게 물회며 갈치조림이며 흑돼지 오겹살 따위를 먹여가면서 여기 있는 동안은 아무 생각 말자고 했지만 그녀도 메뉴판이나 영수증에 적힌 숫자들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는 걸 보면 속으로 분명 쫄리고 있었다. 아내 역시 1년 전 즈음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1인 기업을 창업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안정된 일감을 수주하기가 힘든 상태고 겨우 용돈 벌이하는 정도였다. 돈이 없지 낭만이 없냐고 제주도 한 달 살이 동안 우리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보자며 조금 무리해서 조그만 마당이 있는 독채로 얻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여행과 휴식을 제대로 즐기자 했지만 도무지 온전히 몰입이 되진 않았다. 물론 아무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사 다니면서 맺어 두었던 인맥들과 염두에 둔 회사와의 컨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실제 그들이 정말 나를 필요로 할지도 확신할 수 없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나 역시 다 썩 내키진 않았다. 사실은 무엇보다 심각한 번아웃이 온 것도 분명했고 공황장애 증상도 살짝 있었기에 휴식이 필요하긴 했다.
두 번째 주부터는 여러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 한 시간이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7살 아들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아침에 대충 간단한 과일이나 간식을 싸 들고 천천히 오름 두어 개 정도를 올라 사진 따위를 찍고는 주변 맛집을 찾아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식이었다. 첫 주보다는 분명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고 제주의 오름 풍경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제주도를 몇 번 왔었지만 매번 해안 주변에 머물렀었는데 한라산 자락의 고즈넉한 오름들 사이를 오가다 보니 낯선 자연환경의 제주에 있다는 걸 실감하기 시작했다. 또 계속해서 산길을 걷다 보니 움직이는 내 몸의 존재가 차츰 드러나고 눈앞에 밟히는 작은 풀포기부터 멀리 펼쳐진 이국적 풍경들이 마음속의 잡음 들을 조금씩 침식해 가는 느낌이었다. 비수기인 데다 평일인지라 관광객들이 거의 없다 보니 왠지 움푹패인 오름의 정상은 그 먼 태고적에 한 번 용암을 뿜어내곤 천천히 오랜 시간을 침묵해 오다 그날에야 비로소 우리 세 가족만을 위해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정수리를 드러낸 것 같았다. 문득문득 이곳에서 계속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낯선 이방인으로서 말이다. 이곳이 진짜 집이 되고 여기에 직장이 생기고 저 오름들이 출근길에 보는 북한산처럼 지척에 두고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 된다면 이런 느낌은 아닐 것이므로.
아침이면 아담한 거실로 햇살이 들어왔고- 물론 제주의 변덕스러운 구름은 그 햇살을 쉽게 내어주진 않았다-밤이면 작은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불멍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제주의 바람은 멍할 틈을 내어줄 만큼 고요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앞으로의 일은 몰라도 적어도 지난 직장에서의 끔찍했던 하루하루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제주살이의 중반을 넘길 무렵 김선배가 전화를 했다.
-한라산 한번 올라야지
김선배는 대학선배이자 회사의 상사였다. 나보다 6살이나 위라 학교 다닐 때는 함께 다닌 적이 없었는데 첫 직장에서 나의 사수로 만난 후 꾸준히 연락을 해오던 지인이었다. 5년 전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 제주로 내려와 정착을 했다. 지금 숙소를 추천해 준 것도 김선배였다. 사실 그가 직장을 그만둘 때 나는 여러 번 그를 만류했었지만 지금은 그게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고 느낄 만큼 그는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해서 김선배와 그의 딸 그리고 우리 세 가족이 한라산을 오르게 되었다. 오름을 몇 번 오르면서 자신감을 얻었던지 아들도 흔쾌히 수락을 했다. 그러나 오름과는 달리 한라산은 만만하지 않았다.
-아빠 아직 멀었어?
-거의 다 왔어
-아까 아까부터 다 왔다고 했잖아
-이제 진짜 다 왔어
7살 아이에게 좀 무리였나. 그래도 여기까지 한번 업어달라 소리 안 하고 잘 쫓아와 준 게 고마웠다.
어차피 정상인 백록담까지 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윗세오름까지도 괜한 욕심을 내었나 싶었다. 분명 조금 더 가면 윗세오름까지 가는 나지막한 평지가 나올 텐데. 아직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나는 아들에게 업어줄까 물었지만 녀석은 그래도 자존심을 부리는지 그냥 잠깐 쉬어가자고만 했다. 김선배의 10살 딸도 내 아내도 지쳐 보였다. 김선배가 배낭을 풀고 먼저 앉아 물을 건네며 말했다.
-자 잠깐 쉬었다 가자.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는데 산에 오르니 바로 그 구름 사이로 우리가 들어와 있었다. 사방이 하얀 안개로 뒤덮여 있어 등뒤를 바라보면 하늘이 어디인지 땅이 어디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숨을 골랐다.
-힘들지?
김선배가 말을 건넸다. 어쩐지 그게 등산에 대한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때? 며칠 있어보니까? 별거 없지. 뭐 어디 가든 사람들 사는 데는 똑같더라
- 근데 선배는 확실히 서울에 있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졌어요
-그런가. 그나저나 만만치 않겠지만 새로운 출발 잘해. 너무 겁먹지는 마. 다 살게 되더라. 제주도에서 잘 쉬다 가고
‘다 살게 되더라’는 말이 위로가 될 만큼 내 사정이 가볍진 않았지만 그 순간은 그게 위로가 되어줬으면 하고 그 말의 힘을 붙잡고 싶었다. 그때 흥분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김선배의 딸아이와 아들이 앉아 꽤나 진지하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나 정말이야? 고양이도 있고 강아지도 있어?
-진짜야
-와 좋겠다. 우리 엄만 동물 다 싫어해. 아빠도
아들은 몇 달 전부터 강아지 타령을 했다. 조금 찔렸다. 하지만 책임질 수 없는 대상을 우리를 위해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우리 부부는 심각한 애완동물 기피자였다.
-이름이 뭐야
-고양이 이름은 나비, 강아지 이름은 장자
-장자? 장자가 뭐야
-몰라 아빠가 지어 줬어. 고양이 이름 나비는 내가 지었어 그랬더니 아빠가 서로의 꿈이 되어주라고 지어주셨어
-난 언제 고양이한테 이렇게 물린 적 있어
아들은 얼마 전 친구집에 놀러 갔다 새끼 고양이한테 손가락을 살짝 물린 이야길 하는 것 같았다. 근데 대화에 연결이 없다.
-우리 고양이는 안 물어
-난 진짜 이렇게 막 고양이한테 물렸어. 엄청 아팠어. 난 그리고 괴물 꿈도 꿨어
갑자기 웬 꿈이야기 7살이면 그래도 대화의 맥락은 이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 고양이한테 물려서 괴물이 나타났다는 이야긴가
-그깐 괴물 꿈이 뭐, 나는 엄마 아빠가 사라지는 꿈을 꾼 적도 있어. 자다 일어났는데 엄마 아빠가 사라져서 내가 계속 찾아다녔어 근데 뭐 괜찮았어. 꿈이니까
그걸 또 받아주다니 누나여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그 후로 나는 그들의 선문답 같은 대화에 빠져들었다.
-그치 나도 괜찮았어. 괴물이 잠깐 나왔지만 꿈이어서 괜찮았어 …그치? 꿈이니까 뭐 .
-그거 꿈 아냐. 그리고 사실 지금 이건 꿈이야. 지금 우리 꿈속이다.
선배의 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랐다. 아들이 잠깐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돌아보더니 눈이 마주친 나한테 묻는다
-어? 진짜? 아빠, 진짜 이거 꿈이야
나는 천진난만한 녀석에게 장난을 치느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데. 이게 정말 꿈이라고?
-그래, 왜냐면 내가 여기 꼭대기까지 온 건 꿈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능력이야. 너 근데 지금 되게 오래 잔다 얘야 이제 그만 깨어나!
어린 여자애가 의뭉스러운 데가 있네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그 둘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엄마 지금 이 거 꿈이야
이번엔 엄마한테 확인을 하고 싶어 한다. 그때 아내가 환호성을 질렀다.
-야, 안개가 걷힌다. 우아 저것 봐 얘들아 멋있다.
안개가 걷히면서 파란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번 거두어진 안개는 순식간에 숨기고 있던 비경을 드러냈다. 발아래 운해가 넓은 바다의 파도처럼 하얗게 펼쳐졌다. 풍경을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도 아이들의 표정도 정말 꿈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아들은 안 그래도 산을 오르느라 붉어진 얼굴이 한층 더 상기되어 약간 울상이 되었지만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멀리 보이는 운해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게 꿈이란 말에 당황하고 있는 거 같았다. 아니 어쩌면 갑자기 등장한 운해의 풍경에 꿈속이라는 말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누나가 하는 행동을 따라 앞에 있는 작은 돌부스러기들을 잡고 산아래로 몇 번이고 뿌리듯 던져대고 있었다.
나도 산 아래에 깔린 두꺼운 운해를 바라보았다. 구름 위의 하늘은 더없이 새파랬고 운해는 태평양 끝까지라도 뻗어있을 듯 아득했다. 지난 십몇 년의 회사생활이, 아니 나의 결혼생활이 , 아니 나의 청춘 전체가 그렇게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내가 잠시 제주도에 와 있는 꿈을 꾸는 건지 아니면 이곳에 있으면서 지난 육지에서의 삶을 꿈속에서 꾸었던 것인지 잠시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몽롱함에 빠져 있었다. 하나의 삶이 시작되면 하나의 삶은 꿈이 되어 잊힌다. 나는 약간 울먹이듯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게 되겠지. 어느새 볼을 타고 뜨거운 것이 한 방울 소리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