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초저녁, 해가 낮게 드리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계곡이 내는 맑은 물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스며든다. 단숨에 쏟아지는 소리가 아니라, 돌틈을 지나며 부딪히고 흘러가는 수많은 소리들의 앙상블. 나는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 물가 가까이 홀로 서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기다려온 것처럼, 물과 숲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계곡은 낮과 다르게, 초저녁이 되면 소리가 더 깊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햇살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물소리는 선명해졌다. 한 겹, 두 겹 겹쳐진 물소리가 마음을 통과하며 오래된 기억들을 건드렸다. 어릴 적 여름날, 발을 담근 냉기. 엄마의 손을 잡고 들었던 물소리. 이름 모를 짐승이 물을 마시던 모습까지.
그곳에서 나는 말없이 서 있었다. 나무들은 노을을 등에 지고 침묵했고, 바람은 계곡 물결에 실려 낮은 음률로 변주되었다. 그리고 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며, 모든 것을 지나가는 법을 말해주었다.
‘흘러라’는 그 물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움직임이 아니라 내면의 어떤 흐름을 일깨워주었다. 잠시 멈춰있던 감정들, 숨기려 했던 생각들이 그 소리에 닿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고, 오직 들려오는 물소리에 몸을 기울였다. 그것은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일이었고, 느끼는 일이 곧 살아 있다는 확인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혼자임에도 결코 외롭지 않다는 확신을 얻었다. 자연이 나를 품고 있었고, 그 품 안에서 나는 아주 작지만 분명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계곡의 물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 흐르고 있고, 그 흐름 속에 나는 속해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종종 잊혔지만, 숲과 물 앞에서는 잊히지 않았다. 그들은 내 이름을 묻지 않았고, 대신 나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였다. 초저녁 숲의 계곡은 말한다. “흐르듯 존재하라, 그렇게 충분하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오래도록 물소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