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1화. 그날, 나는 퇴사했다
그날은 특별하지 않은 화요일이었다.
늘 그렇듯, 출근길 지하철은 붐볐고,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창밖은 흐렸고, 내 마음도 그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눈앞에 펼쳐지는 회색 도시 속, 나의 목적지는 회사였다.
하지만 그 회사가 내 삶의 목적지인지에 대해선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늘 열심히 일했다.
일을 미루는 법도, 대충 하는 법도 몰랐다.
‘잘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 안은 점점 텅 비어갔다.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주말에도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다.
성과는 나왔지만, 웃음은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잦아졌다.
어느 날, 조용히 사직서를 썼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거창한 결심도 아니었다.
그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작고 단단한 목소리를 따랐을 뿐이다.
서류를 출력해 책상 서랍 안에 넣고,
며칠을 더 다녔다.
마지막 날, 팀장님께 조심스레 내 의사를 밝혔다.
놀란 얼굴보다
"그래도 너니까 잘 버텼지"라는 말이 더 아프게 남았다.
그날, 나는 퇴사했다.
출근하지 않는 첫 아침이 찾아왔다.
시계를 보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자니
처음엔 두려웠다.
하지만 곧 마음속에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감정이 피어났다.
'살아 있다.'
아주 단순한, 그러나 확실한 감각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퇴사는 '도망'이 아니라 , 시작'이었다.
지금 나는 조금 느려졌고,
그만큼 더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진 모르겠지만,
이젠 삶의 방향을 내 손으로 잡고 싶다.
느리게, 하지만 제대로 걷고 싶다.
2화. 아무것도 안 하는 연습
퇴사 후 첫 아침,
알람 소리가 없는 하루가 낯설었다.
눈을 떴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누워서 천장을 오래 바라봤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처음 며칠은 기분이 좋았다.
커피를 천천히 내리고,
책을 펴고, 음악을 틀고.
“이게 진짜 삶이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이 찾아왔다.
일을 하지 않는 나,
계획 없는 하루를 보내는 나.
그런 ‘나’가 너무 낯설고
어딘가 실패자처럼 느껴졌다.
매일 아침, 달라진 건 없지만
마음은 롤러코스터처럼 출렁였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이러다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스스로를 향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질문들은 때때로
내가 결심했던 퇴사의 의미마저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SNS도, 책도, 계획표도 없는 하루.
창밖을 보고, 잠시 눈을 감고,
기분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연습.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에 중독된 나에게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감각은 낯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하루를 보내고 나서야
마음 한구석이 조금 따뜻해졌다.
그건 성취에서 오는 안정이 아니라
멈춤에서 오는 회복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게 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삶의 일부라는 걸.
삶은 속도가 아니라,
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비로소 ‘나를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3화. 나는 왜 글을 쓰게 되었나
퇴사하고 몇 주가 지났을 때쯤,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취업 준비도, 자격증 공부도 아니었다.
문득 떠오른 건, 글쓰기였다.
딱히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블로그를 꾸준히 했던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글을 보여준 적도 없다.
하지만 어느 날, 메모장 앱을 열고
짧게 한 줄을 써 내려갔다.
“오늘도 살아냈다.”
그 문장이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 만들었다.
딱히 잘 쓴 글도 아닌데,
그 안에 묘한 위로가 있었다.
마치 지금의 내 마음을
아무도 몰라줘도
내가 알아줘서 괜찮다고 말해주는 느낌.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글을 썼다.
주제는 정해두지 않았다.
그냥 떠오르는 감정, 생각, 기억을
흘러가는 대로 써 내려갔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됐다.
말로 꺼내지 못했던 감정들이
조용히 언어가 되어주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진짜 나’를
조금씩 만나가는 시간.
신기하게도,
글을 쓰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걸 두려워하는지,
어떤 말에 상처를 받는지,
무엇을 꿈꾸는지.
그동안 너무 바빠서 지나쳐버린
나 자신의 표정을
글 안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퇴사 후에는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고.
재취업, 창업, 자격증…
하지만 나는 글을 쓰면서 느꼈다.
준비보다 더 중요한 건
‘회복’이라는 걸.
글은 내게 회복의 시간이었고,
내 마음을 묵묵히 듣는 친구였다.
이제 나는 매일 쓰기로 했다.
짧아도 좋고, 서툴러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가 나에게 솔직해지는 시간.
퇴사 후, 내가 찾은 가장 확실한
자기 자신과의 연결 방식.
그게 바로 글쓰기였다.
4화. 돈보다 시간, 명함보다 이름
퇴사한 지 두 달째.
나는 여전히 명함이 없다.
소개할 직장도 없고, 직책도 없다.
처음에는 그게 무척 불안했다.
"지금 뭐 하세요?"라는 질문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내 이름’보다 ‘내 회사 이름’이 더 중요했다.
소개할 때도, 이메일을 보낼 때도
명함 앞면에 적힌 로고가
나를 증명해 주는 느낌이었다.
퇴사하고 나니,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
남은 건 이름 석 자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나는 진짜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일까.
직장을 제외한 나, 성과를 제외한 나,
호칭도 없는 나.
조용히 자문해 봤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그 질문에 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를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매일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사람이고 싶고,
때로는 느려도,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요즘 나는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주말과 평일의 경계도 희미하다.
그게 불안하면서도 자유롭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명함 없는 삶은 허무하지 않냐’고.
하지만 나는 안다.
이제야 비로소
내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5화. 다시 시작하는 삶에게
긴 터널을 지난 느낌이다.
물론, 여전히 나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불안은 찾아오고,
미래는 여전히 흐릿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모든 변화는 '갑자기'가 아니라
'천천히' 온다는 걸.
퇴사라는 단어는
한때 내게 도망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발판이었다.
나는 그 발판 위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 자신을 다시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더 많이 고민한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하는 시간이
내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사람들은 묻는다.
“앞으로 뭐 할 거예요?”
나는 이제 이렇게 대답한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조금 더 나답게 살고 싶어요.”
이 시리즈는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다.
속도를 줄이고,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전환은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