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십 년 전, 봄 —
스물여덟 살의 이영(李英)은 길을 걷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 전쟁이 끝났다. 몽골이 물러갔다.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영에게 돌아갈 곳은 없었다.
집은 불탔고, 가족은 흩어졌고, 양반 신분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등에 멘 보따리 하나. 그 안에는 낡은 옷 몇 벌과 어머니가 남긴 은비녀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글을 배웠지만, 전쟁터에서 글은 쓸모없었다. 칼을 들 줄도 몰랐고, 농사를 지을 땅도 없었다.
그때, 강화도의 한 노인이 말했었다.
젊은 양반, 그 손은 참 고운 손이구먼. 흙을 만져보지 않겠나?
도공 노인이었다. 전쟁 중에도 청자를 굽던.
도자기라...
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영에게 천하고 귀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개경에 가면 도공 스승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이영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지금, 개경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었다.
이영은 길가 큰 나무 아래 앉았다. 보따리를 풀어 마른 주먹밥을 꺼냈다.
멀리서 사람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피난민들이었다. 열댓 명쯤. 모두 지쳐 보였다.
이영은 주먹밥을 입에 넣으려다 멈췄다.
그들 중 한 여인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마른 몸. 하지만 눈은 맑았다.
여인이 쓰러졌다.
이영이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여인이 눈을 떴다. 이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영의 심장이 멎었다.
아름다웠다.
병들고 지쳤지만, 여인의 눈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했다.
"물을..." 여인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영이 급히 물통을 꺼내 여인의 입에 댔다. 여인이 물을 마셨다.
"감사합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어지러울 뿐..."
여인이 일어서려 했지만 다시 비틀거렸다. 이영이 부축했다.
"쉬었다 가십시오."
"하지만 일행들이..."
"제가 말하겠습니다."
이영은 여인을 나무 그늘로 데려갔다. 조심스럽게 앉혔다.
피난민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이 다가왔다. "월선이가 또 그러는군요."
"월선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저 아이 이름이 월선(月仙)이오. 궁녀 출신이라오."
이영이 여인을 다시 보았다. 궁녀. 그래서 그렇게 고운 것인가.
"병이 있으신 겁니까?"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궁에서 도망칠 때 얻은 병이라오.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저 아이는 얼음장 같은 물에 숨어 있었다오. 그때부터..."
"치료는 못 하셨습니까?"
"어디 약이 있어야지. 그냥 버티는 거요."
이영의 가슴이 아팠다.
일행은 쉬어가기로 했다.
이영은 주먹밥을 월선에게 건넸다. "드십시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배고프실 텐데요."
"당신이 먹을 것을..."
"저는 괜찮습니다."
이영이 웃었다. 월선도 작게 웃었다. 그리고 주먹밥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봄바람.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디로 가십니까?" 월선이 물었다.
"개경입니다. 거기서 도공 스승을 찾아보려고요."
"도공이요?"
"예. 청자를 만드는 일을 배우려고 합니다."
월선의 눈이 빛났다. "청자! 아름답죠. 궁에서 본 적이 있어요. 푸른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녀가 말을 멈췄다. 슬픔이 스쳤다.
"궁에 대한 좋은 기억은 아니시겠군요." 이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에요." 월선이 고개를 저었다. "무서웠지만, 아름다운 것들도 많았어요. 청자, 그림, 음악..."
"고향으로 돌아가십니까?"
"예. 전라도 나주로요. 거기 부모님이 계세요. 살아계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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