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에 맺힌 겨울의 첫 문장 [수필]
문을 열면 비로소 만나는 계절
밤새 나를 붙들고 있던 것은 두터운 솜이불의 무게가 아니라, 아랫목 장판 밑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르던 달큼한 온기였다. 구들장을 타고 올라온 열기는 등줄기를 타고 번져 온몸을 나른하게 적신다. 그 온기에 몸을 맡긴 채 누워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소란과 근심으로부터 격리된 채 오직 나만의 작은 우주 속에 머무는 듯한 평온함이 찾아온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농담 섞인 말이 이 순간만큼은 철학적인 진리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달콤한 늪에 침잠해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큰맘 먹고 이불을 걷어내자, 몸에 감겨 있던 가느다란 온기가 아쉬운 듯 허공으로 흩어지며 서늘한 공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는 길,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감각한다. 아직 온기가 고여 있는 방 안과는 달리, 거실은 이미 밤사이 창틈을 타고 내려앉은 냉기에 길들여져 있다. 맨발에 닿는 나무 바닥의 감촉이 차갑다기보다 매끄러운 유리 위를 걷는 듯 선뜩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바짝 웅크린 채 마당으로 이어지는 육중한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 짧은 복도를 지나는 동안 내 몸은 아랫목의 기억을 지우고 차츰 바깥의 시간에 적응할 준비를 마친다.
철컥, 차가운 금속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마당으로 나선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차가운 바람에 숨이 턱 막힌다. 그것은 단순히 기온이 낮아졌다는 물리적인 변화를 넘어선다. 계절이 제 영역을 확실히 선포하며 살갗의 모공 하나하나를 두드리는 서슬 퍼런 기운이다. 마당의 공기는 어제보다 한 뼘 더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고,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숨은 머릿속까지 하얗게 헹궈낼 만큼 시리다. 첫 숨에 섞여 들어온 냉기가 가슴 안쪽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든다.
마당 풍경 또한 그새 표정을 바꾸었다. 장독대 위에는 희뿌연 서리가 내려앉아 아침 햇살에 가느다랗게 빛나고 있고, 화단의 잎사귀들은 밤새 치열하게 추위와 싸웠는지 생기를 잃은 채 몸을 한껏 오므리고 있다. 마당 구석에 쌓인 낙엽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마른 비명을 지른다. 그 메마른 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질 때마다 가을의 잔상들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찰나였다. 코끝이 시큰해지더니 어느새 투명하고 맑은 콧물 한 방울이 맺힌다. 비단 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몸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계절의 속도를 코끝이 먼저 알아채고 보내는 일종의 전령 같은 신호이리라. 손등으로 콧물을 슬쩍 훔쳐내며 나는 헛웃음을 짓는다. 이 코끝의 시큰함이야말로 겨울이라는 거대한 계절의 문턱을 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소박한 통행료가 아닐까. 따뜻한 안온함 속에만 머물러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이 서늘하고도 선명한 생의 감각.
살을 에듯 차가운 공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이 계절이 지금 내 코앞까지 당도해 있음을 온몸으로 실감한다. 안락한 이불속에서는 무뎠던 감각들이 이 시린 바람 속에서 비로소 날카롭게 깨어나 세상을 읽어내기 시작한다. 추위는 불편함이 아니라, 잊고 있던 나를 일깨우는 죽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선다. 여전히 아랫목은 치명적인 유혹의 빛을 보내고 있겠지만, 방금 마당에서 마주한 그 서늘한 여운이 코끝에 남아 자꾸만 정신을 맑게 깨운다. 이제는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두툼한 스웨터를 꺼내고, 찻물을 올려야 할 시간이다. 콧물을 훌쩍이며 닫은 문 너머로, 겨울이 성큼성큼 마당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문을 닫아도 이미 내 안에는 겨울이 한 조각 들어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