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
이른 오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 여름의 열기는 도심을 휘감으며 숨을 턱턱 막히게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깊은 계곡, 나무 그늘 아래에 나는 혼자 앉아 있다. 뿌리 깊게 내려앉은 오래된 고목들이 나를 감싸 안고, 그 사이로 흘러드는 햇빛은 부드럽고 살갗에 닿아도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새들의 지저귐은 규칙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더욱 자연스럽고 생명감 넘친다. 이름 모를 새들이 번갈아가며 무대에 오르는 듯한 느낌. 이 작은 숲 속 콘서트는 어떤 악보도 필요 없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유영하며 지나갈 때, 잔잔한 속삭임처럼 귓가에 닿는 소리는 마치 먼 옛날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 같다.
바람은 그냥 공기가 아니라 기억의 전달자처럼 느껴진다. 나뭇잎의 초록 냄새, 흙과 이끼가 자아내는 깊고 포근한 향, 계곡물에 씻긴 돌에서 나는 묵직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게 와닿는다. 순간순간 내 인생의 페이지들이 스치듯 떠오르다 사라진다. 무언가 특별한 향이 있을 때, 나는 오래전 어느 여름날을 기억한다.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왔던 강가, 아버지의 웃음,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주먹밥, 그런 것들이 바람에 실려 돌아온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휴대폰은 아예 꺼두었다. 세상과의 연결을 끊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연결을 회복하는 중이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렵거나 외롭지 않다. 오히려, 혼자인 이 시간이 가장 나다운 시간이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내 마음을 따라 울리는 공명처럼 느껴진다.
내가 누군지, 어디쯤 와 있는지, 또 앞으로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아주 조용히, 아무런 부담 없이 되묻는 순간들이다. 이곳에는 답이 없다. 하지만 답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고, 인정하며, 잠시 멈춰 서는 것. 그것이 이 계곡의 진짜 선물이다.
계곡의 나무 그늘 아래서 보낸 이 오후는 잠시뿐이었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 고요한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더욱 선명하게 느꼈다. 세상은 늘 소란스럽고 바쁘지만, 그 한가운데서 이렇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인생의 숨겨진 보석처럼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