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에 서서
하루의 끝자락, 해가 뉘엿뉘엿 산 아래로 몸을 누이기 시작하면
세상은 붉은빛의 붓질을 받은 듯 물들기 시작합니다.
도시의 소음도 점점 멀어지고, 들녘의 시간은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흐릅니다.
오늘 저녁, 나는 그 들길을 걷습니다.
갈대가 우거진 작은 길—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 갈대는 몸을 숙이며 인사를 건넵니다.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하고, 침묵이라고 하기엔 너무 명확한 그 흔들림.
마치 말 없는 위로처럼, 내 어깨 위의 무언가를 살며시 걷어내는 손길 같아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노을이 눈부시게 퍼져 있습니다.
그 빛은 해의 작별 인사이면서도, 또 하루를 살아낸 나에게 보내는 작은 포옹 같기도 해요.
노을은 말이 없지만, 그 색감 하나로 많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라는 말,
‘내일도 괜찮을 거예요’라는 믿음.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한 붉은 물감.
바람은 갈대를 쓸며 지나가고, 내 마음도 그 바람에 실려 떠다닙니다.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바람 속에서 얼굴을 내밉니다.
어릴 적 걷던 시골길, 부모님의 손등, 첫사랑의 웃음소리…
바람은 아주 부드럽게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가, 다시 현재로 끌어옵니다.
걷다 보면 어느새 해는 사라지고, 갈대는 어둠 속에서도 고요히 춤을 춥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평온이 들어서고,
내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집니다.
이 순간, 나는 사람들 사이의 소음과 요구들로부터 멀어져
진짜 나와 마주합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고요하며, 가장 진실한 나.
오늘 저녁의 산책은 단지 ‘걷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여행이었고, 나를 다시 ‘나’로 되돌리는 의식이었습니다.
갈대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고, 노을은 조용히 나를 물들이며 흘러갔습니다.
바람은 나를 쓸어내렸고, 어둠은 나를 쉬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오늘 저녁, 나는 들에서
아무 말 없는 치유를 받았습니다.
내일의 내가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