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경계에서

by 산들강바람


여름은 그림으로 치자면 가장 선명한 색을 지닌 계절이었다. 물감을 아끼지 않은 듯, 쨍한 햇빛은 모든 풍경에 강렬한 명암을 드리웠고, 잎사귀들은 푸르다 못해 검푸르게 빛을 빨아들였다. 찌는 듯한 열기는 땅을 달구어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고, 그 일렁이는 공기 속에서 세상은 마치 거대한 불덩이가 숨 쉬는 듯했다. 모든 것이 끈적하고, 모든 것이 뜨거웠다. 그 뜨거움은 단순히 온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활기였고, 거침없는 생명력이었다.


여름의 초상은 질주하는 야생마와도 같았다. 망설임 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본능적인 질주. 우리는 그 질주에 몸을 맡기고, 멈출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냈다. 풀잎의 끝에서 터져 나오는 녹음의 함성처럼, 매미들의 목청은 찢어질 듯 울어댔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해 질 녘까지 끊이지 않았다. 여름의 시간은 늘 모자랐다. 하루는 턱없이 짧았고, 우리는 해가 저물어가는 것이 아쉬워 밤늦도록 골목길을 서성였다. 밤이 되어도 식지 않는 공기 속에서 우리는 잠 못 이루고 청춘의 꿈을 꾸었다. 여름은 그렇게 우리에게 '가장 뜨겁게 살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러나 그 모든 열정에는 필연적으로 소모와 피로가 따르는 법이었다. 너무 뜨겁게 달구어진 냄비는 바닥이 타버리듯, 여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문득 삶의 무게를 느끼곤 했다. 끊임없이 쏟아내는 열정의 이면에 감춰진 공허함,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다 지쳐버린 마음이 서서히 드러났다. 맹목적으로 앞으로만 달리느라 주변의 풍경을 놓쳤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씁쓸한 맛을 남겼다. 우리는 뜨거운 열정의 그림자에 숨겨진 외로움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건 마치 쏟아지는 태양 아래에 서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그림자의 깊이와도 같았다.


나는 여름 내내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보며,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잊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저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며, 내 안의 진정한 목소리를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여름의 초상이 화려하고 강렬할수록, 그 끝에 다가오는 고요함은 더욱 깊은 반성을 요구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의 맑은 하늘처럼, 모든 소음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뜨거웠던 열기와 활기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지금, 나는 이 여름의 초상을 다시 그려본다. 화려한 색채 뒤에 숨겨진 공허함과, 맹렬한 질주 뒤에 남겨진 고독을 덧칠하며. 그리고 그 그림이 완성될 때쯤, 나는 비로소 가을이 선물하는 고요한 사색의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입추(立秋)'라는 단어를 들으면, 내 마음은 언제나 미묘한 떨림을 느낀다. 맹렬했던 여름의 한가운데, 달력에 새겨진 그 글자 두 개는 마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발견한 오아시스처럼 느껴진다. 계절의 경계에 선 시간. 아직은 한낮의 햇살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마르게 할 만큼 뜨겁지만, 공기 중에는 미세한 변화의 입자들이 떠다닌다. 한때는 둔탁하고 무거웠던 공기가, 이른 새벽이나 해 질 녘에는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숨결로 바뀌는 찰나. 그 찰나를 우리는 '입추'라 부른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변화는 소란스럽지 않고, 다만 조용하고 확고하다. 잎사귀들은 여전히 푸르지만, 그 푸른빛은 여름의 맹목적인 생명력에서 벗어나 한결 깊고 차분해졌다. 매미들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우렁차지만, 그 소리에는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아련한 기색이 묻어난다. 들판의 벼이삭들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고, 그들이 머금은 곡식의 무게만큼 세상은 겸손해지는 듯하다. 자연은 우리에게 넘치던 것을 비우고, 쏟아내던 것을 거두어들이는 지혜를 가르쳐준다. 여름처럼 맹목적으로 달리기만 했던 우리는, 이 시기에 비로소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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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고요함, 바람의 속삭임, 강과 계곡의 흐름, 그리고 바다의 깊이를 글로 담아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저에게 가장 진실한 위로와 질문을 안겨주었습니다. 수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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