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

현실 감각이 나를 채근하기 시작한다

by 푸르다

문득 현실감각이 나를 두드렸다. 11월은 참 많은 생각이 드는 달이다. 초조함, 불안함, 조급함을 곱씹으며 거실 테이블 위의 달력을 바라보았다.

'해가 바뀌기 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서 재취업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라는 조급한 마음과 함께, 마음 한쪽에서는 아직 마지막 달은 아니니 괜찮지 않냐고 나를 다독이는 달콤한 유혹이 피어오른다. 11월은 나에게 마지막 유예기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쇼츠를 보며 의미 없이 흘리는 시간을 아까워하면서도 정신을 차리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그렇게 무엇이라도 하나 더 나를 채우는 활동을 하고 싶어 초조한 마음만 움켜쥐고 있다.






해가 따스하게 내리쬐는 낮. 책을 읽다 돌연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찾아오면 베란다 너머에 펼쳐진 풍경으로 고개를 돌린다. 온 세상이 미니어처로 보이는 그 순간만큼은 나의 근심과 걱정을 모두 놓아버릴 수 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음이 울렁거리고 이대로 세상이 멈추기를 바라보지만, 구름이 태양을 가리며 만들어낸 그늘과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 교차하며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인간은 결코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 우리 모두의 앞에는 공평하게 유한한 시간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 어떤 사건들로 채워질지는 결코 알 수 없다.

가만히 니체의 철학을 떠올려 본다. 나의 삶이 모래시계가 뒤집힌 것처럼 그대로 다시 반복이 된다면? 나는 그 사실을 결코 알 수 없다면? 영원히 반복될 뿐이라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최근에 다시 읽으며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니체가 만난 악마를 떠올렸다.


이 삶이 그대로 반복되기를 바라는가? 나는 나의 20대까지의 삶이 결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 나의 삶을 어떻게 채우면 좋을지에 대한 의문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우선 모든 사람들이 그렇든 '잘 살고 싶다.' 하지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좋은 집? 좋은 차? 비싼 옷? 나에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코 나의 '잘 산다'의 기준이 물질적인 것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브랜드 아파트에 꼭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외제차를 끌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명품을 들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아예 욕심이 없다 부정할 수는 없지만, 내 삶의 필수 요소로 여기지 않는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곳, 큰 불편함 없이 끌고 다닐 수 있는 차, 적당히 질 좋은 옷. 현재 내가 가진 것이 나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삶의 허기를 느끼는 부분은 어디인가. 바로 '경험'이다.


지하철을 타본 경험, 비행기를 타본 경험, 해외 입국 심사를 받아본 경험,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게스트 하우스에서 파티를 하는 경험, 즉흥으로 훌쩍 어디론가 떠나보는 경험, 거절당하는 경험, 생각지도 못한 호의를 받는 경험, 무작정 발 닿는 대로 길을 걸어보는 경험, 처음 만난 사람과 수다를 떨어보는 경험, 축가를 해주는 경험 등등.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경험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단 한 번도 맞닥뜨려본 적 없는 일일 수 있다. 나는 내가 여태껏 무서워서 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고 싶다.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닌 일들이 얼마나 발목을 잡아대는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레 삶의 자잘한 경험을 쌓아온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그것도 모르냐는 눈초리를 받지 않는 삶이, 저도 모르게 쌓인 경험들로 세상의 충격에 의연한 삶이 그리 부러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뒤늦게나마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 물론 나의 속도에 맞추어서.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변하지 않고 정적인 편이라고 자신을 여겨왔지만, 돌이켜보면 변화를 싫어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삶의 변화에 휩쓸리며 조금씩 조금씩 변해왔다. 가만 보면 제법 잘 견디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더 다양한 것으로 나를 채우기 위해 용기를 내보려 한다. 내 삶의 모래시계가 뒤집히고 다시 이 삶이 반복될 때, 20대의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삶을 약속하기 위해서.





어느덧 11월의 중순. 현실 감각이 다시 나를 채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불안에 잠식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며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스케줄러에 적어본다. 그리고 올해 하반기에 내가 새롭게 한 경험을 열거해 본다.


브런치에서 연재 시작하기, 뱅크시 전시회 관람, 공모전에 작품 제출, 두 번째 일본 여행, 좋아하는 게임의 팬 페스티벌 참가, 친구의 결혼식 축가, 소묘 수업 꾸준히 듣기, 간단한 사물 스케치 연습, 일주일에 세 번은 산책 나가기. (*집 앞의 좋은 공원을 두고도 나는 몇 년간 일을 핑계로 산책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에게 남은 유예기간을 어떤 경험들로 채울 수 있을까.

적어도 2025년이 되기 전, 그때 할걸! 하고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내일의 계획을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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