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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배아를 추모하며...

난임부부의 시험관 1차 실패담

by 단신부인

반년동안 숨기고 있던 걸 밝히기로 했다.

연초부터 휴직했다는 사실과,

질병코드가 N97.9(상세불명의 여성난임)이라는 것을.

집안에 아프고 돌아가신 분이 많아서

모친이 걱정할까봐 그간 비밀로 해왔던 것이다.


어떻게 발화해야할까.

머릿속으로 연신 시나리오를 그려댔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신의 억장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려면

내 눈물샘을 부여잡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엄마 나 병원다녀" 라는 말 한 마디에

툭, 하니 돌아온 대답은 "산부인과?"였고,

고개를 끄덕거리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들려온 말.

"애가 안 생겨서?"

... 하, 우리 엄마 눈치 한 번 빠르다.

어쩜 이리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척 알아듣지?


솔직히 털어놓았다.

작년에 난임진단을 받은 것,

인공수정은 이미 2차례 홍양으로 종결한 것,

최근에 비임신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시험관 1차까지.


호르몬 제재를 복용하고 배주사를 맞고,

프로게스테론 부작용으로

겨드랑이, 서혜부 일대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까지 했는데도

착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주치의 선생님은 그 수정란을 '눈사람 배아'라고 했다.

5일 배양을 시켜서 자가 분화하다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모양이 눈사람을 닮았다고 해서 그리 부른단다.

감자배아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상등급에 준할 정도로 좋은 배아였다고 한다.


배아를 이식하던 날, 사진을 받아서

출입문 앞에 붙여놓을 정도로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허나, 피검사 결과는 첫 컷트라인을 넘지도 못했다.

마저 동결시켜놓은 1개는 눈사람 배아보단 양질이 아니다보니,

주치의는 내게 난자채취를 다시 할 것을 권했다.

한 번 겪었으니 어떤 절차로 이뤄지는 지 벌써부터 선하다.

한동안 또 배가 아프고 밑이 빠지는 느낌을 겪겠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고달프랴.


그나마 이제 심신의 위안이 되는 한 가지는

엄마가 내 상태를 알았다는 사실이다.

내내 숨기고 있어 마음이 찜찜했는데 다행이다.


당신께선 나를 탓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괜찮다고 다독였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현대가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가 완고했던 시절이었다면 절대 없었을 일 아닐까?


"안생기면 뭐 어때. 없어도 잘만 살아."

의외로 쿨한 모습에 내가 다 벙쪘다.

담담하게 말해놓고선 주말이 되면 전화해서 몸은 괜찮냐고 묻는다.

"주사가 아프지, 다른 데는 괜찮아. 곧 난자채취 할거야"


딱, 올해까지만 해보련다.

신선이든 동결이든, 시도해보고 안되면 그제서야 마는거지.

스스로 끝내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눈사람 배아가 핏빛으로 쏟아지던 기간에

생각보다 많은 양에 사뭇 놀랐다.

아- 임신이라는 건 정말 쉽지 않구나.

혈류가 이렇게나 많이 통해야 하는거였구나.

내 몸에 자리잡기 위해 너 역시 쉽지 않은 노력을 했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이 닿지 않아 유감이야.


나의 첫 눈사람 배아를 이렇게 떠나보낸다.

내 몸에 잠시 머물렀던 너의 흔적을 이렇게 기린다.

안녕, 만나서 진심으로 반가웠어. 안녕...


#난임 #임신출산 #시험관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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