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졌다.
그 해 여름, 나는 낮은 산봉우리와 구름 사이의 석양이 아름다운 골짜기 어귀 근처 산 위에 살았다.
완전한 기억을 불러내기란 불가능하지만, 9살 무렵 그곳에 아주 잠깐 살았었다.
왜 낯선 그곳에서 스치듯 잠깐 머물렀었는지, 그 시절을 공유했을 누군가에게 묻고 확인하는 절차를 굳이 실행에 옮기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내 기억 속에 자리한 그곳에서의 짧았지만 왠지 신비스러우면서도 내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있는 비밀스러움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인적 없이 길게 늘어져 있는 아스팔트 위로 뜨겁고 강렬하게 내리쬐던 투명하고 하얀 태양빛을 잊을 수가 없었고, 아주 작은 의미조차도 공유할 수 없는 고요하기만 했던 적막을 내 뇌리에서 떠나보낼 수 없었고, 석양의 붉은빛을 등지고 검은 숲 속으로 사라진 낯선 이방인들을 평생 나의 기억 속에 뭉쳐 두었었다.
그들이 왜 이토록 오랜 시간 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언덕 위의 외딴 산장과 검은 숲, 봉우리와 구름사이에서 강렬한 붉은빛을 내뿜던 석양과,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대며 미끄러져 배수구로 사라지던 검은 뱀의 축축하고 미끌거리던 감촉들이 이토록 선명하고도 집요하고 또렷하게,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위쪽으로 경사진 오르막 아스팔트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이정표에 정신문화연구원이라고 큼지막하고 또렷하게 쓰여있었다. 내 기억에는 그 길로 어떠한 자동차도, 또한 어느 누구도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반대편으로 길게 이어진 길은 내리막길인데, 마찬가지로 어떠한 형태로든 유동적인 움직임을 본적은 없다. 나는 그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를 기대하며 매일매일 뜨거운 태양을 마주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해 여름, 아스팔트 길바닥 위에는 투명하게 빛나는 8월의 태양빛이 거울처럼 내 모습을 일렁이며 반사해내고 있었다.
투명한 아스팔트 내리막 길 위에 구불구불 형이상학적으로 널브러져 있는 나무 막대기가 신기해서 손을 뻗었다. 순간, 억지로 뭉쳐 넣어 꼼짝 못 하다가 한꺼번에 팽창하는 고무호스 속의 물처럼, 화들짝 풀어헤쳐져 길 옆 배수구 쪽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나는 너무 놀라서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지구의 중력을 뿌리치고 우주로 냅다 날아오르는 로켓의 굉음 소리를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손 끝뿐만 아니라, 온몸에 미끌거리는 점액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불쾌한 감촉이 물컹거렸다.
나는 불쾌하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위장이 이글거리는 이 감촉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손바닥과 종아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딱히 뭐가 묻어 있지도 않았을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내리막길을 등지고 뒤로 돌아, 정신문화연구원 쪽 경사진 길로 빠르게 올라갔다.
이윽고, 왼쪽에 높은 옹벽과 오른쪽으로 숲이 우거진 사잇길에 나있는, 숲 때문인지 다소 어둡다고 느껴지는 언덕길을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 커브길을 돌아 왼쪽으로 돌면 산비탈 높은 언덕 위에 산장이 외따로 서있었다.
산장 주변에는 이웃집은 고사하고, 다른 어떤 형태의 건축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원 주변으로 꽃이 피어있고, 잔디밭에는 풀이 제법 자라서 구불구불한 길에 깔린 디딤돌들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사방으로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산장은 조금은 어둡고 외딴 느낌을 더욱 주었다. 그렇다고 방치되었다거나 황폐하다거나, 비밀스러운 느낌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멀리 보이는 산골짜기에 산봉우리 여러 개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밤이면 별빛이 지붕 위에 쏟아지고, 바람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고요함을 채웠다. 이곳은 어찌 보면 속세와는 단절된 듯 보였지만, 날것의 자연과는 가장 가까운, 마치 혼자만의 시간을 간직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은신처처럼 느껴졌다.
나는 잔디사이로 구불구불 뻗어있는 디딤돌길을 따라갔다. 끝이 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하게 다듬어진 하얀 각목으로 만든 낮은 울타리가 둘러쳐진 집 주변으로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본채에 맞붙어있는 작은 헛간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었는데, 제초기와 정원관리에 필요한 공구와 잡다한 여러 가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나는 헛간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서 한 바퀴 돌아보고는, 여느 때처럼 까치발을 들고 거실처럼 꾸며진 큰 방의 격자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격자창을 통해서 나무가 우거져 검은색으로 보이는 건너편 숲이 건너다 보였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그곳에 있는지, 그들이 무슨 연유로 격자창 안의 거실에 머물고 있는지 나는 어리벙벙한 상태인 채로 너무나 놀랐다. 집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잘 보일 것 같은 현관문이 있는 앞 유리창 쪽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몸을 우거진 장미 넝쿨사이에 숨기고,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 낯선 이들이 무슨 연유로 그곳에 있는지 하얀 나무 울타리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붉은 장미 꽃잎을 만지작거리며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들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두 명의 남자였다. 중간 키보다 조금 더 큰 몸집의 남자는, 다부지고 건장한 체격에 단단하고 묵직해 보였고, 그보다 키가 한 뼘 정도 더 큰 호리호리한 또 다른 남자는 날카롭고 민첩해 보였다. 그들의 눈빛은 기민하고 예사롭지 않아 보였으며, 몸짓은 모두 빠르고 강인해 보였다. 호락호락한 남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조금의 빈틈도 없어 보였다. 옷차림은 8월의 태양빛에 어울리지 않는 카키색과 연한 베이지색 점퍼 차림에 군복 비슷한 바지와, 굽이 단단해 보이는 등산화 비슷해 보이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키가 보다 작은 남자는 꿰뚫어 보는 듯한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작은 두 눈 탓에 아주 기민하고 더 민첩해 보였으며, 딱 벌어진 체격 탓에 실제보다 키가 작아 보이기도 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는 상대적으로 덜 민첩해 보였지만, 냉정하고 차분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햇빛에 잔뜩 그을린 피부 탓에 더 강인하고 힘이 세 보였다.
왜 그들과 나 사이에 다른 어느 누구도 끼어들 공간이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그 시점에 왜 그들을 나 혼자 맞이해야 했었는지 남아있는 기억은 없다. 단지, 이상하리만치 그 시점에 그들과 나 사이에 다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강인한 그 무엇이 존재했었던 것 같다.
호리호리한 남자가 묘하게 분석하는 눈빛을 담고 잠시 내게 머물렀다. 숨느라 숨었는데 그에게 들킨 것인지 어떤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더욱 몸을 웅크리고 허둥대며 그저 애꿎은 장미 잎사귀만 만지작거리다가, 방심하는 바람에 장미 가시에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찔렸다. 미세하게 피가 배어져 나왔다.
입을 굳게 다문 그의 두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은 별다른 말을 나누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가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거나 끄덕이거나가 다였다. 그들은 탁자 주변에서 움직임도 거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인기척 하나 없었다.
고양이 앞에 목숨을 내맡긴 생쥐를 닮은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소심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뿐이었다. 격자창의 그들 너머로 나무가 우거져 검게 뭉쳐있는 숲이 보였다. 그들처럼 그 숲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서로 별 말이 없었다. 간혹 마주 보며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고, 굳이 의미 있을 것 같은 이 정적을 깨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장미가시에 찔린 오른쪽 새끼손가락 끝 마디에서 피가 스며 나오더니, 쌀 알 만큼 동그랗게 맺혀서 점점 더 커졌다. 이윽고, 완두콩만큼이나 커지더니 옆으로 주르륵 힘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새끼손가락 끝 마디에서 아려오는 통증과 함께 장밋빛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흘러내린 장미꽃 잎사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괜스레 짜증이 났다. 천천히 새끼손가락을 입에 물고 깨물듯 쪽쪽 빨기 시작했다. 비릿한 피냄새가 옅은 쇠냄새로 바뀔 무렵, 새끼손가락을 입 속에서 최대한 천천히 빼내면서 고개를 들어 격자창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끼손가락 끝 마디에서 기분 나쁜 통증이 확장되는 내 동공 속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사라졌다.
격자창 너머로 검은 숲만 넘겨다 보일뿐, 그들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집안을 훑어보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홀연히 나타났던 그 순간처럼,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비탈길을 단숨에 뛰어내려 갔다.
아스팔트 대로는 여전히 8월의 뙤약볕에 불타고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의 인기척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머리 위를 짓누르던 뜨거운 태양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하늘은 서쪽 끝에서부터 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그 빛은 점점 산장 외벽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창 밖너머, 하루 종일 햇살에 찬란히 빛나던 숲도 이제는 그 빛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우거진 나무들은 하나 둘 어둠 속으로 녹아들며, 이젠 짙은 먹빛의 실루엣으로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바람은 아직도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산장의 창가로 붉게 떠오르다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과 그 아래로 펼쳐진 검은 숲의 윤곽이 마치 또 다른 세계의 입구처럼 보였다. 그 순간, 이 산장은 마치 세상의 끝자락에 홀로 서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닿지 않는 고요 속에서 시간은 천천히, 붉은빛을 검은 어둠으로 바꾸고 있었다.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하얀 나무울타리를 지나 살짝 열린, 현관문을 잡아당겨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언제부터 켜져 있었는지 모를 라디오에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문단속을 철저히 할 것과 수상한 사람들을 보면 지체 없이 신고하라는, 남자 아나운서의 다급함을 감춘 경직된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