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는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의 번잡함과 소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4월 하고도 9일.
점심시간을 막 끝내 가는 거리는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의 번잡함과 소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거기에 바람이 약간 곁들여 있었는데, 김 빠진 사이다를 마셨을 때의 엷은 쌉싸름함이 묻어나는 공기였다. 햇살은 딱 기분 좋을 만큼 따스했다.
얇은 니트에 프라다 조끼를 겹쳐 입고 스카프만 두르기를 잘했다.
2층으로 올라가 입구를 따라 들어가니 이태리 신사처럼 차려입은 매니저가 긴 로비를 지나
퀸스 다이닝 룸이란 곳으로 안내했다. 은은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눈길을 끈다.
어느 선생님께 하셨어요?
처음 왔는데요.
아메리카노를 주문받은 여직원은 잠시만 기다리시면 준비하겠노라며 조용히 물러갔다. 전반적으로 첫인상은 괜찮다. 어깨를 지나 너풀거리면서 신경을 거슬리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었는데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상큼한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건넨 명함에는 스타일리스트 미주라고 박혀 있었다. 명함은 특별할 건 없다. 밋밋한 일러스트 밑으로 No.274라고 적혀 있어서 궁금한 마음에 물어볼까 하다가 결국엔 까먹고 말았다. 그녀 옆에는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여성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는데 한 팀이라고 했다.
이렇게 나는 4월 하고도 9일의 오후를 온전히 그녀들에게 저당 잡히고 말았다.
스타일리스트 보조 아가씨는 전망 좋은 자리로 안내를 하고는 주부생활, 레이디 경향, 스타일 매거진을 테이블 위로 펼쳐 놓았다. 4월호는 다른 고객이 보고 있어서 잠시 후에 갖다 드리겠다며 너무나도 죄송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괜찮다고 미소 지으며 쓴 맛만 남아있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주부생활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는 왜? 미모, 재력 게다가 임신까지 한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과 바람을 폈을까. 그것도 신혼인데 말이다. 남자들은 단지 종족 보존을 향한 무한한 사명을 띠고 단세포적으로 여인들을 취하곤 했었는데, 현대에는 그나마 이성적인 자기 절제류가 늘었지만 바람둥이들은 그 이성적인 판단에서 심리적으로 병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가 임신을 했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미인이건, 성적 매력이 넘치건 상관이 없다는 논리다. 유명 배우인 그를 다분히 남성의 시선으로 쓴 듯하여 기자 이름을 찾다가 못 찾았다.
떨떠름한 가십거리를 몇 장 넘기니 거장 임권택 감독이 김훈의 화장을 안성기 주연으로 만들었단다. 소금기 없이 담백하기만 한 화장을 임권택이란 거장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기대가 된다. 오랜만에 황석영 작가의 얼굴도 보인다.
그녀들의 분주한 손길 사이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존 레전드의 올 오브 미가 뒤이어 흐른다. 그리곤, 신세대들에게 익숙할 듯싶은 힙한 음악들이 두서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어떤 곡에서는 초점 잃은 영혼처럼 같은 구간을 몇 번이나 반복하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찾아서였지만, 세 번째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본 이후에는 그 짓을 하지 않았다. 기하학적으로 이어진 천장의 무늬들 사이에 숨어있는 스피커를 결국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음료를 서비스하는 카페 벽 위로 걸려있는 전자시계는 벌써 16 :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도 지쳤는지 6을 가리키는 점선 중 한 개가 계속 껌뻑거렸다. 두 번째 음료인 아이스티의 얼음은 빙하에서 떨어져 나가 대서양으로 흘러든 얼음 모양새인지 오래이다. 혹시 무료하면 읽을까 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을 넣어왔었는데 그것도 벌써 반 이상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너무나 고맙게도 스타일리스트 보조 아가씨가 나를 샴푸실로 이끌었다. 은은한 조명에, 벽이며 천장이며 의자가 온통 검은색이라서 마치 블랙홀 속으로 들어온 듯 착각을 일으켰다. 의자에 편안히 눕자 다리 쪽이 서서히 들어 올려지며 침대처럼 변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자세를 좋아하지 않는다. 최대한 편하게 있으라는데 결코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꼭 허공에 매달린 굴비 같은 느낌이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요즈음 머리 왼쪽이 멍하니 막혀있는 느낌이었는데, 박하 향처럼 쏴아 하고 트이는 것 같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가 샴푸를 마친 후, 깃털처럼 가벼운 타월로 머리칼을 감싸고는 일으켜 주었다. 눈을 뜨면 천장에서 별이라도 쏟아질 듯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스타일리스트 미주의 작업이 끝났다.
나는 처음에 인터넷에서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검색해서 그녀에게 참고할 것을 권했었다. 하루키의 주인공 누구처럼 나 또한 그 행위가 초래할 결과와 그 행위를 회피함으로써 초래될 결과와의 사이에서 몇 번의 망설임을 겪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세심한 손놀림을 끝내고 탁자 위에 있던 안경을 건네주었다. 희뿌옇던 화면은 안경을 걸치고 바라보는 내내 점점 투명해졌다. 혹시나 했던 그곳에는 재벌집 딸도, 자신감에 넘쳐 얼마간은 건방져 보이는 아리따운 젊음도 없었다. 지극히 평면적이고 익숙한, 견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과물만이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긋나긋한 서비스에 넘어가 받은 케어 비용까지 합쳐 만만치 않은 금액을 결제하는 동안, 스타일리스트 미주와 보조 아가씨는 아주 상냥한 미소를 띤 채 양손을 공손히 마주 잡고 서있었다. 그리곤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고객님, 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한꺼번에 밀려드는 4월 하고도 9일의 햇살은 어처구니없게도 그 모습 그대로다. 갑자기 멍해져서 한 동안 서 있던 나는 할 수 없이 하루키처럼 뭔가 좋은 생각이 날 때까지 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은 왼쪽이 확실했음에도 나는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