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빗 속을 걷고 싶었어요

그러면 내 맘 속 어수선한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 같았거든요

by 윤수현

그냥, 빗 속을 걷고 싶었어요.

단지 그뿐이었어요.

그러면 내 맘 속 어수선한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 같았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우산도 쓰지 않고 나서고 싶었지만, 미친 사람인 줄 알까 봐 그러지 못했어요.

초록색 우산을 골라 들었지요.


거리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어요.

근처 공원으로 가야겠어요.

지금은 그저 혼자서 빗 속을 걷고 싶을 뿐이니까요.


은빛공원

아직은 아무도 보이지 않네요.

중간쯤에 넓게 위치한 파크 골프장 위로 군데군데 꽂혀 있는 붉은 깃발들이 빗줄기에 축 처져 있어요.

잠깐, 그중 한 개가 나풀 흩날렸어요. 숫자 8이 나 여기 있어, 하네요.

아주 고요합니다.

빗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마음에 들어요.


갑자기 주위가 쏴아 밝아지더니, 굵기가 다른 빗줄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아기 참새가 파크 골프장 울타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다가 단풍나무 아래로 쏜살같이 날아가 버립니다.

단풍나무 아래는 물기 없는 붉은 흙더미가 보송보송하네요.


네모난 작은 구멍들이 무수히 박혀있는 사각 맨 홀 뚜껑 속으로 빗물이 미친 듯이 몰려 들어갑니다.

조심조심 다가갔어요.

안을 들여다보았지요.

일 미터쯤이나 될까요, 뚜껑 아래로 검은 소용돌이가 검은 굉음을 내며 무섭게 빗물을 빨아들이고 있어요.

내 마음 같아서 겁이 덜컥 났습니다. 잠시동안 그렇게 보고 있었어요.


삶이 참 그렇죠?

내 맘 처럼 됐으면 싶은데 자주 그렇지가 못한 것 같아요. 정반대 일 때가 오히려 더 많지요.

문득, 나는 지금 내 삶의 어디쯤에 와있는 것일까 생각했어요.

검은 소용돌이는 여전히 굉음을 내며 빗물을 계속 빨아들이고 있네요.


아무도 없는 농구장이네요.

백발의 노인이 농구공을 양말을 구겨 넣은 운동화 옆에 기대어 놓고는 벤치에 비스듬히 쪼그려 앉아 왼쪽 엄지발가락을 왼쪽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빗물이 넘쳐흐르는 웅덩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요.

그 공간은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았어요.


검은 돌다리 사이사이에 토끼풀들이 가득 피어있는 숨은 공간을 발견했어요.

울퉁불퉁한 돌 위로, 잠깐씩 드러나는 흙 위로, 흐드러진 토끼풀 위로 빗줄기가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네요.

토끼 풀이 가득한 곳만 골라서 밟아보고 있어요.

어느새 네 잎 클로버를 찾고 있었네요.

멈추어야겠어요. 그런 행운은 오지 않을 테니까요.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올라 조명등 위에 나란히 앉아 축구장을 내려다보고 있네요.

물기를 머금어 더욱 선명한 초록색 매트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흔들의자가 보이네요. 잠시 앉았어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앞 뒤로 흔들었어요. 살짝 떨리는 긴장감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흔들의자 왼쪽에 펼쳐서 세워놓은 우산이 바람에 날려 두 바퀴를 돌아 도망가네요.

허겁지겁 잡으려다 고꾸라질뻔했어요.

참, 우습죠.


갑자기 저 앞 쪽에서 비둘기 떼가 사선으로 날아오르더니 잣나무 숲 너머로 사라지네요.

하늘과 대지가 어두워지더니 쏴아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어요.

빗줄기가 춤을 춥니다. 춤사위에 맞춰서 노랫소리도 들리네요.


한동안 멍하니 쏟아지는 빗줄기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굵기가 다른 빗줄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빗줄기가 만들어 놓은 웅덩이에 크기가 다른 투명한 우주선들이 떠다니다가 앞 다투어 사라집니다.


흔들의자에서 내려 천천히 빗속으로 걸어갔어요.


부리부터 목덜미 아래까지는 금빚이 감도는 짙은 옥색으로 감싸고, 몸 쪽은 갈색과 흰색이 지그재그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비둘기 한 마리가 농구장 쪽에서 걸어오더니 제가 서있는 세 갈래 길에서 멈추어 섰어요.


어디로 갈까? 아름다운 비둘기가 물어보네요.

글쎄, 너는 어디로 가고 싶은데?


생각에 잠긴 비둘기는 작고 앙증맞은 핑크빛 발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한 바퀴를 빙 돌더니, 날개를 펴고 잣나무가 우거진 쪽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아름다운 비둘기가 날아간 잣나무 너머의 어디쯤을 바라봅니다.

줄기차게 쏟아내던 빗줄기가 서서히 잦아드네요.

주변이 밝아졌어요. 공기는 차분해진 듯하고요.


저 멀리 입구 쪽에 색색의 우산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네요.


폭우가 휩쓸고 간 대지에 비둘기들이 내려앉습니다.

부지런히 무언가를 쪼아 먹습니다.


주변은 한층 더 밝아졌어요.

우산을 접어도 되겠어요.


또 다른 태양이 곧 다시 뜰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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