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나는 집을 짓고 싶다.

by 윤수현

남산이다.

몇 년 만에 와 보는 남산은 다보탑의 세련미와 석가탑의 소박함을 함께 지니며 여전히 아름다웠다.

문예지의 대표님을 모시고 L언니와 함께 한 남산은 주말을 맞아 내국인보다 외국인들로 가득 차서 또 다른 풍염 한 색채를 뽐내고 있었다. 더 할 수 없이 무르익은 가을의 남산은 처연하고 처절하게 아름다웠다.

어느 누가 이 가을의 농염한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으랴! 나의 이 속절없는 언어의 취약함으로는 단 한 줄도 표현할 수조차 없다.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스치는 모든 이들이 정겹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함께 사진 속으로 들어가고 싶고 빨강, 노랑 오묘한 색으로 머리칼도 함께 물들이고 싶다.


남산의 명물이 된 지 오래인 '사랑의 자물쇠'는 바벨탑처럼 人間 군상의 염원을 간직한 채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광장에 묵직하게 울리는 남미의 이름 모를 무명 가수의 '베사메무쵸'에 잠깐 귀 기울인다. 베사메 베사메무쵸~ 깊숙한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참 좋다.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일렁인다. 갈색커피가 몽글몽글 담긴 종이컵을 감싸 쥐며 팔각정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날이 갈수록 대하는 일마다 설기만 하는 어제오늘인데 지금 이 순간은 온몸의 신경이 이팔청춘이다.

아래로 낮게 흐르는 성곽을 등뒤로 하고 벤치에 나란히 앉은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데 여자가 연상인 듯했다. 한데 하는 양이 아주 귀엽다. 도시락을 싸 온 모양이다. 동그란 핑크색 도시락에 담긴 김밥을 맛나게 다 먹고 이번엔 샌드위치를 꺼내든다. 포일에 싸인 샌드위치를 왼손에 들고는 오른손으로 한 겹 한 겹 벗겨내더니 앙하고 베어문다. 목이 메는지 보온병에 담아 온 미역국인지 우거지 된장국인지를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서로 따라주며 참 맛깔나게도 먹는다. 나도 모르게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과일 디저트까지를 다 먹어 치울 때까지 그들은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사랑을 나누는 그들이 이 가을에 부럽다.


어느 누가 가을은 전쟁을 치른 폐허라고 했던가.

그 자리에서 침몰해 버린다고 했던가.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


가을은 너무나 미치도록 아름다워서 너무나 살고 싶게 만든다. 이 대지에 깊게 뿌리박고 처절하게 살고 싶게 만든다. 그들의 허물을 자양 삼아 오묘한 색깔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고 싶게 만든다.

꽃피는 봄과는 또 다른 시작인 것이다.


릴케는 가을날에 뒤늦게 집을 짓지 말라고 노래했지만 나는 이 가을에 집을 짓고 싶다. 남산 소나무 숲을 울타리 삼아, 지나는 나그네는 어느 누구라도 들어와 향기 좋은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는, 아담하고 소박한 가을 집을 짓고 싶다.


이 가을은 미치도록 처연한 아름다움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어 무심히 가려하지만 나는 아직 보내고 싶지 않다. 가을은 까닭 모를 슬픔이 있다. 문득, 그 까닭을 알고 싶은 내숭한 마음이 일었지만 눈치채지 못하게 슬며시 내려놓았다.

남산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발 밑에는 여전히 깊은 가을이 여전히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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