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 비는 내리고

최대한 주방 안쪽으로 처절히 내달렸다.

by 윤수현

짙은 회색의 빗줄기가 옅은 회색의 빗줄기를 감싸 쥐며 아래로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멀리 보이는 한강 수면 위로도 물폭탄이다. 하늘에서 튕겨져 나온 빗방울들이 베란다 유리창에 다닥다닥 붙어있다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고흐를 닮은 노란 해바라기가 전체적으로 크게 양각된 머그잔 밑바닥에 까맣게 눌어붙은 커피에서도 비 냄새가 났다.

엉덩이에 힘을 주고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어 찻잔을 들여다본다. 표정 잃은 나를 닮은 누군가가 눌어붙은 커피 향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무심하게 마주 보고 있다.


한동안 결혼 전의 남자에게서 줄기차게 전화가 왔었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맹렬하게 울려대는 전화기를 던져 놓으면 한참을 그렇게 울어대다가 갑자기 무중력 상태의 어느 시간처럼 뚝 멈추어 버렸다. 술만 먹으면 그는 전화를 했다. 받지도 않을 전화를 헤대며 그는 무엇을 갈구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의 냉혹하기만 했던 이성까지도 얼어붙게 했던 것일까. 깨어보면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한때 아름답다고 착각했던 순간들이 어딘지도 모를 우주의 차가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어리석은 두려움에 떨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의미 없는 날들의 권태로움에 알량한 허무라는 이름의 고독을 덮어 씌운 것일까. 아니면 그냥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때론 원인을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떨 때가 있다. 신은 아주 가끔 인간들에게 대상을 특정 지을 수 없는 그리움에 영혼과 시간을 할애할 자유를 부여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사랑하는 이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움의 대상을 찾아 헤맨다. 외로움에 끝은 없다. 만남도 없다. 다만 미친 그리움만 있을 뿐이다.

밤마다 그에게 계속 쫓겨 다니는 똑같은 꿈을 꾼다. 결국엔 낭떠러지 앞에서 속절없이 멈추어 깨지만 매일밤 들판을 달려야 하고, 어두운 숲 속을 달려야 하고, 깎아지른 암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집 안에서 비 냄새가 났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는 사각의 공간에서 몹시도 무거웠다. 주변의 모든 습기 가득한 물방울들을 다 끌어 모아서 무질서하게 정렬해 있다.

뿌연 유리창을 오른손 검지로 닦아내는 부질없는 짓을 계속 헤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유의미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할 수가 없다. 나의 뇌는 이미 생각 회로가 멈추어버려서 더 이상은 아무것도 저장할 수 없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전체 길이가 6cm. 검은색 몸통은 3.5cm 정도. 투명한 그물망으로 이어져 있는 두 개의 날개는 곱게 마주 접혀 다소곳이 대칭으로 붙어 있다. 눈은 각도상 잘 보이지 않고 1cm 남짓한 길이의 길쭉한 더듬이 두 개는 검은 철사처럼 쨍쨍해 보이는데 끝은 가늘고 날렵한 모양새다. 그 옆으로 비슷한 형태의 더듬이 두 개가 한 개는 15도 각도 나머지 한 개는 40도 각도인 기이한 모양새로 베란다 방충망 맨 왼쪽 중간쯤에 떡하니 붙어 있다. 항문은 아래쪽 가운데쯤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는데 그곳이 항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림잡을 뿐. 눈은 옆으로 미세하게 돌출되어 붙어 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증명할 수는 없다. 나는 그것에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커먼 물체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밤의 전령처럼 내 쪽으로 어둠의 색채를 뿜어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당장이라도 방충망을 뜯어내고 내게로 달려들 것만 같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그것을 등지고 거실을 통과해 최대한 주방 안쪽으로 처절히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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