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
그녀는 도대체 어쩌려던 것일까

지금도 문득 궁금하다

by 윤수현

그녀를 놓쳤다.

그녀의 뒤꽁무니는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던 그녀는 신뢰의 빗줄기는커녕 혼돈의 어지럼증만 흩뿌려 놓은 채 사라져 버렸다.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해서 쫓아왔건만,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그녀가 공중 부양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차가운 새벽의 공기에 스며들기 라도 했단 말인가.


아침 햇살에 찬란히 빛나던 산맥들, 푸르른 색채로 빛나던 대지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머릿속은 하얗고 까만 피아노 건반 같은 혼란스러움이 뇌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 뭉클거리고 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결단코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 길을 따라 앞으로 가보기로 했다. 길만 따라가면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집으로 가기 위한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는, 주관적이고 강압적인 확신에 의지한 채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다져진 뽀얀 길은 반들반들 빛을 내며 위험하지 않게 오갈 수 있을 만큼의 넓이 만으로 이어져 있었다. 15분 정도 오르니 바위산이 보였다. 그리 가파르지 않아서 오를 만해 보였다.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보기에 만만해 보였던 것이지 호락호락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등산화를 갖춰 신은 것도 아니어서 발은 자꾸 미끄러지고 손은 잡을 곳을 찾지 못한 채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앞을 볼 수 조차 없어 수없이 팔 안쪽에 얼굴을 비벼대야 했다. 힘겹게 바위산을 넘어서니 왔던 길과 흡사한 완만한 내리막길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길만 따라가면 별 문제없을 것이다.


그런데 길을 잃었다. 길이 사라졌다. 인간들에게 공식적으로 허락된 반들반들 빛나던 말간 길이 사라져 버렸다. 매서운 새벽 공기에 젖은 옷이 몸에 감겨와 한기가 들었다. 두 손으로 목소리를 모아 그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러 보았다. 어느 쪽에서도 그녀의 생기 있는 반응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의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그녀는 나를 기다려 주어야만 했다. 그녀는 새벽 산행을 운동 삼아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는 아주 수월했을 것이고 속도 또한 나와는 견줄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몇 주 전부터 부득불 나와의 새벽 산행을 고집했었다. 야행성인 나의 게으른 루틴을 바꾸어 주겠노라고 자기만 믿고 따라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호언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의 당당하고 상냥했던 미소와 모습은 길을 잃은 얼빠진 나만 버려두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새벽 풀에 맺힌 이슬처럼 그녀에 대한 나의 믿음도 사라졌다.


바위 산을 다시 넘을 수는 없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완만해 보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을 낼 수 있음 직한 곳으로만 걸음을 옮겼다. 한 참을 걷다 보니 갑자기 바닥이 무너졌다. 작은 경사면 아래로 미끄러지듯 굴러 떨어졌다. 손등은 까지고 발목은 시큰거렸다. 거의 평지에 이를 즈음에 철조망에 위험출입금지, 문구가 적혀있는 세모난 비닐이 매달려 나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위치도 종로 쪽인 듯했다. 이러면 거의 정반대다. 다리가 풀렸다.


숲은 거대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똑같은 표정의 그들은 똑같은 얼굴로 손짓하고 있을 뿐이었다. 빽빽하게 서있는 나무들 때문에 숲은 어두웠다.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야 했다.

지금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나의 의지대로, 나의 힘으로, 나의 생각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친 상태라고나 할까.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불안했다.


작은 경사면 중간 허리쯤 올라갔을 무렵, 나무들 사이로 언뜻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희망적이다. 첫 햇살이 나뭇가지에 스며드는 것처럼 희망이 찾아왔다.

순간, 뒷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경사진 풀숲의 바닥에 납작 몸을 엎드렸다. 등산복을 가볍게 차려입은 남자다. 혼자였다. 침통한 표정의 그는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더더욱 바닥으로 몸을 엎드렸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느낄 겨를조차 없이 본능적인 직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엎드려 숨 죽이고 있는 콧구멍 속으로 풀 냄새가 진하게 스며들었다. 땅은 축축하고 흙냄새는 숨이 막히게 했다.

핸드폰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다시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다시 덮어 씌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나는 드디어 그녀의 순진한 배려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청구아파트가 부도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도 모르고 조합아파트를 신청했었다. 묻고 따지지도 않고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그곳을 신청했다. 지지부진한 진행 상황에 찾아간 본사는 어수선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만 북적거렸다. 위치도 구기동인줄 알았는데 홍은동 산자락이었다. 빌라가 여러 동 넓게 자리한 부지와 뒷 산까지 깎아서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다고 했다. 사업은 그렇게 흐지부지 세월만 잡아먹고 있었다. 앞이 안보였다. 조합원들이 모여 내린 결론은 빌라에 입주하는 것이었다. 빌라라도 잡고 있어야 유리하다는 입장들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조합장은 희망적인 말만 늘어놓았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위치도 좋고 하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했다. 조합장의 월급도 조합비에서 꼬박꼬박 주어지고 있었다. 그 일을 그녀가 맡아서 하고 있었다. 다들 순진하고 좋은 사람들만 모여서 일하기도 수월해 보였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사람도 없었고 순순히 따라주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반기를 들었다. 조합장 월급을 계속 주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차선책으로 일정 부분 월급을 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합장의 의중까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조합장에게 순박하다 못해, 무지하고 맹목적인 추종에 눈이 먼 그녀에게는 받아들이기 거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이렇게 산속에 홀로 버려두기를 작정했을 거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정상적인 인간의 상식이라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시간의 흐름은 삐쭉대거나 옆으로 나아가거나 하지만 결국은 쭉쭉 앞으로 나아간다. 내게도 그랬다.

똑같은 표정의 거대한 숲 속을 헤매기를 몇 차례. 드디어 낯익은 길이 두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가는 길이 땅 밑에 숨어있다 툭 튀어 올라온 것처럼 거짓말 같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이 길이 이 현실 세계에서 사라져 버리기 전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뿐 다리는 움직여주질 않았다. 빌라 입구가 보였다. 낡아서 허름해 보였던 빌라 단지가 지금은 금덩이를 칠한 듯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그녀는 나에게 아무 말도 없었다. 나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을 들을까 봐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후에 그곳을 떠나온 후 20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문득 궁금하다.

혜정, 그녀는 도대체 어쩌려던 것일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