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와의 게임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고요한 밤이었다.
그는 지금 몹시 피곤했다. 오른쪽 입술을 타고 흐르는 무언가를 혀로 핥았는데 비릿한 철 냄새가 났다.
잠이 왔다.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몸을 한껏 움츠린 채 잠이 들었다. 아주 오래오래 잤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보다. 온몸이 축축했다.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억지로 사실을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또 잠이 들었다. 생각이라는 것이 자꾸 그를 졸리게 했다.
깊은 바다 보다도 더 푸른 어둠. 어림조차 할 수 없는 깊은 암흑. 그는 길을 잃었다.
이곳에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게 뒤죽박죽 이런저런 일들이 앞 뒤가 맞지 않게 엉켜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요한 밤이었다. 아니 고요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지구가 종말을 고하듯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깊고 깊은 바다 보다도 더 푸른 빗줄기가 어림조차도 할 수 없는 어둠을 더 암흑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 어둠이 너무 깊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 너무 피곤했지만 다시 또 생각을 해 보기로 했다. 이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하고.
그는 축축하고 차가운 계단에 앉아 있었다. 아파트 동과 동을 이어주는 연결 공간인 듯했다. 2미터 정도 계단을 올라와서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지 아니면 반대쪽으로 돌아서 다른 동으로 이동하는지 하는 쓰임새인가 본데 왜 이리 불편하게 설계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주위에는 인기척이라곤 없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다행히 담배는 쟈켓 오른쪽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추위로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담배를 한 개비 물고 라이터의 불을 켜려고 애를 썼지만 불빛은 작은 불꽃만을 튕겨내며 꺼져버렸다. 그는 몇 차례 똑같은 그 짓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입에 물었던 담배를 천천히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잡아 뺐다. 찝찌름한 피맛이 배어 나왔다. 통증이 찌릿하게 전해왔다.
그는 천천히 왼손을 펴서 입술을 만져보았다. 퉁퉁 부어 윗입술인지 아랫입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치아 쪽에서도 통증이 느껴졌지만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양손을 펴서 손가락 끝으로 얼굴을 더듬어 만져 보았다. 오른쪽 손 끝으로 끈적끈적 무언가가 만져졌다. 관자놀이 아래쪽 광대뼈 부근이 쓰리고 아팠다. 입술 아래쪽으로 해서 턱 부분도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끈적끈적하고 찝찌름한 피가 그의 왼쪽 볼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도대체 그 피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자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알았다. 머리칼에서는 푸르고 깊은 어둠을 머금은 빗물이 뺨을 간질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빗물은 몹시 차가웠다. 엷은 하늘색 쟈켓과 안에 받쳐 입은 흰색 줄무늬 니트와 청바지는 흠뻑 젖어서 어딘지 모를 통증을 부여잡고 몸에 최대한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집에 가고 싶었다. 격렬하게 집에 가고 싶었다. 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깊고 푸른 빗줄기만 그의 얼굴에 쏟아져 내렸다. 그는 마침내 핸드폰을 생각해 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드디어 그를 둘러싼 어둠의 심연에서 작은 사각의 빛이 딸깍하고 빛을 발하더니 그의 얼굴을 밝혀 주었다. 그곳에는 J국장의 전화번호가 마지막으로 찍혀 있었다. 스마트폰의 디지털시계는 새벽 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J국장과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J국장은 불확실성의 검은 어둠을 확실성의 하얀색으로 교묘하게 채색하기에 아주 능한 사람이다. 명확하진 않지만 처음에는 J국장도 아주 조금은 순수함이 있었다고 믿고 싶었다. 그는 J국장의 불확실성이 매우 위험하고 불완전하다고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그의 페르소나와의 게임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그의 절실함을 J국장은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것일까. 아무리 손을 쓴다고 해도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게 언제였더라.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열정만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우던 그 하얀 날들이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명확한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더 깊게 생각하기엔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졸음이 아까부터 그에게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잠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려올 것만 같았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을 수가 없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의 따스한 목소리로 모든 일들이 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온기로 가득 찬 우리 집으로 가고 싶을 뿐이다. 단지, 그뿐인데 그는 그녀의 전화번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너무 지쳤다.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감으면 이 어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상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추위와 차가운 공기는 그의 정신을 깨어 놓기에 충분했음에도 그는 오히려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는 몸을 고슴도치처럼 움츠려 최대한 따뜻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어찌 됐든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그가 살아가야 할 이유들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 줄기 뜨거운 눈물 방울이 검붉은 색을 띄운 채 사각의 작은 불빛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가 푸르고 검은 빗줄기 가운데에 섰다. 그리곤 그녀가 자기를 찾기 쉽게 넓은 곳으로 가기 위해 애를 썼다. 멀리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가 가고 있는 반대 방향에서 들렸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