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이 태어나듯 새 날이 오는 것이다.
그녀를 다시 본 것은 지난번 계단에서의 대화 후 정확히 삼 일 후였다.
그녀는 오늘도 아래쪽 계단의 중간쯤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 꺾어지는 지점에 있었다. 무릎을 양팔로 감싸 안고 한 껏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어디 갔었어?
어디 아팠어?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며칠 사이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핏기 없는 안색은 더욱 창백해 보였고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퀭한 시선으로 어딘지 모를 계단 모서리 어디쯤에 멈추어 있었다.
아팠어.
그녀는 계단의 모서리 어디쯤에서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별에 다녀왔어.
별?
너의 별이 있는 거야?
어디에 있는데?
이름도 있어?
그녀는 대답대신 왼쪽 종아리를 감싸 쥐고 있던 오른손을 풀어 두 무릎 위에 올리고, 그 위에 올린 창백한 얼굴을 왼쪽으로 천천히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마치 커다란 아기 송아지 눈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너무도 슬프고도 지독히 아름다워서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건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켰었다.
블루버드야.
위성이 6개 있지.
6개나 있어?
지구에서 63광년 떨어져 있어.
어린 행성이지.
이 별은 정말 빨리 돌아. 아마 세상에서 가장 빨리 돌걸?
하루는 8시간 밖에 안돼.
8시간?
왜 그렇게 빨리 도는데?
왜냐하면 밤이 너무 길면 싫기 때문이야.
아침이 빨리 와야 보고 싶은 얼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
누가 보고 싶은데?
별에 누가 살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무릎에 올린 팔에 턱을 괴고 시선을 계단의 모서리 어디쯤으로 돌린 채 아주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블루버드는 아주 작은 행성이야. 한 사람만 살 수 있지. 커다란 은행나무도 한 그루 있어. 가을에는 아름다운 노란 은행잎이 나풀나풀 춤을 추지. 그 은행잎들 사이로 아름다운 파랑새 한 마리가 노래하며 날아다녀.
아름답지 않아?
햇살이 반짝이며 동쪽에서 떠오르면 파랑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며 새벽이 왔음을 알려줘.
생각만 해도 평화롭고 예쁠 것 같아.
나의 첫 번째 위성은 블루버드 1이야.
모든 것이 소리와 음악으로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행성이지.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날마다 노래하는 오페라 하우스가 아름다운 호수 위에 떠있어. 아치 모양의 아름다운 구름다리를 건너야 하지. 그 아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사랑을 전해. 그 아름다운 아이가 노래를 하면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은행나무의 노란 잎사귀를 흔들고 파랑새가 그 잎사귀 사이를 날며 행복을 전하지. 그 아이는 이제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전할 수 있을 거야. 그 꿈을 이루는 그 순간, 그 아이는 정말 아름답게 빛날 거야.
블루버드 2는
아주 정의롭고 마음이 따뜻한 사랑스러운 잘생긴 아이가 살고 있어. 하지만 사춘기 시절에 나쁜 친구들을 사귀는 바람에 사랑스러움이 혼란스러운 두려움으로 바뀌어 방황하고 있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오는 상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현실의 안일한 유혹에 영혼이 소멸되어 버렸지. 슬픈 일이야.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모습은 마음이 아프지만 성장의 과정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아이는 누구보다도 어렸을 적의 순수하고 정의로웠던, 따뜻하고 다정했던 자신의 모습을 찾고 싶어 할 거야. 방황의 상처를 딛고 결국 더 강한 내면의 힘을 키우겠지. 결국엔 사랑과 정의로움으로 가득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별이 될 거라고 믿어. 그래서 블루버드 2는 희망으로 항상 가득 차 있어. 파랑새가 노란 은행나무 주변을 날아다니며 아름다운 소리로 희망을 노래해. 희망으로 가득 찬 아름답고 평화로운 별이야.
블루버드 3에는
아주 귀엽고 부지런한 사랑스러운 아이가 살고 있어. 아기자기 귀여운 농장과 아름다운 작은 집이 있지. 파랑새가 노란 은행잎 사이를 날아다니며 노래하는 아주 아름다운 정원도 있어. 그 아이는 항상 부지런히 무언가를 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주변을 깨끗하게 유지해. 항상 사람들을 돕는 그 아이의 아름다운 작은 집에서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 냄새가 흘러넘치지. 그 아이는 책임감과 열정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항상 해낼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별이야.
블루버드 4는
호기심이 가득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랑스러운 아이가 살고 있어. 따스한 감성이 풍부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내며 다른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될 거야. 그 아이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깃든 글들이 많은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서 그래도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해 줄 거야.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는 거야. 안타까워. 블루버드 4는 특별히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살 수 있어. 엄마 잃은 강아지를 구해주었거든. 그 따뜻한 마음이 정말 아름답지? 강아지와 함께하는 소중한 하루하루는 글 속의 감정과 이야기에 더욱 풍성하고 특별한 깊이를 더해주겠지. 그 아이는 이제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에서 강아지와 함께 마음껏 글을 쓰며 모든 이들과 행복을 노래할 거야. 정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별이야.
블루버드 5 위성은
웃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가 살고 있어. 모든 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아이지. 그 아이의 웃음은 마치 태양처럼 주변을 따뜻하게 비추고 그 미소만으로도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는 존재야. 그 아이의 존재 자체가 사랑을 퍼뜨리는 힘이 되어주지.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 웃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지. 항상 웃음과 희망이 가득한 사랑스러운 별이야.
블루버드 6은
너무나도 총명하고 똑똑한 아이가 살고 있어. 나는 이 아이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너무나도 빨리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마음의 병이 있어. 그 아이는 마음속 깊은 상처를 감춘 채 겉으로는 밝고 씩씩하고 당당하지. 하지만 내면에서는 엄청난 외로움과 슬픔을 감추고 있을 거야. 그 아이는 아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슬픔을 나누는 것이 어려운 경우가 많을 거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을 테니까. 가슴 아픈 일이야. 그렇지만 그 아이의 똑똑함과 총명함은 언젠가는 그 마음의 병을 이겨내고 치유할 수 있는 큰 힘이 되리라 믿어. 그 아이가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들을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 그 아이는 똑똑하고 강한 만큼 어느 순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찾을 거라고 생각해. 마음속 깊은 상처도 언젠가는 그 아이의 성장의 일부가 되어 더 큰 아픔과 사랑을 품을 수 있겠지. 그 아이가 자신을 다시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총명함과 따뜻함이 더욱 빛을 발하고 더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줄 거야. 그래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별이야.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마친 그녀의 아기 송아지를 닮은 큰 눈동자는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거칠게 가빠오는 호흡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망울은 침착함을 유지했으며 아주 평화스러웠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나는 참으로 이상했다. 이 세상에서 그녀와의 시간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누구처럼 그녀와 나만의 시간에 더 이상 미래를 선사할 수 없음에 한없는 걱정스러움과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으로 숨이 막혀 왔다. 그녀와 내가 그동안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 그렇게 속절없이 허공에 흩어져 미세한 공기 속으로 날리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가슴 한편에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가 큰 구멍을 내고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했다. 심장언저리의 고통에 영혼이 타들어 갔다. 그녀는 그렇게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대지의 품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정말 그럴까. 누가 그랬듯이 우리는 장작불이 타들어 가듯이 소멸되어 가는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는 숨을 쉴 때마다 순간순간 죽어가는 것일까. 나는 그녀를 간절히 간절히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보내지 않아도 될 방법을 어떻게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라 온 우주에서 온 에너지를 끌어모아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면 다시 138억 년 전에 설정된 몸속의 시계가 멈추어버려 그녀의 시간도 멈출 것만 같았다. 블랙홀이 우주의 모든 사악하고 썩은 물질들을 빨아들여 그녀 몸속의 시계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나는 매일매일 그녀와 만났던 계단 밑을 찾아갔다. 그녀의 몸속 시계가 다시 째깍째깍 돌아가서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녀 몸속의 시계는 다시 돌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뇌세포는 시간당 15,000개씩 줄어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남겨 놓았을 그 무엇을 찾아 그 계단 밑을 샅샅이 뒤졌지만 불행히도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뿐인 삶이라 삶을 비교할 순 없지만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들은 나의 영혼의 평화와 안식이 존재와 소멸 사이를 오가는 것과 같았다.
다만, 아쉬움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새날이 어제를 기억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은 없다. 그녀와 함께 했던 어제는 다시는 없는 것이다. 시간은 절대로 거슬러 갈 수 없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처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구별한다. 또다시 해가 뜨고 아침이 왔다. 시간이 우리를 절망으로만 데려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새 생명이 태어나듯 새날이 오는 것이다. 138억 년 전에 우리 태양의 심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블루버드 4에서 그렇게 138억 년 전의 태양의 심장을 갖고 다시 새롭게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