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린 먼로를 닮은 여인

나의 텅 빈 동공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by 윤수현

그녀가 걸어오고 있다.

아니 그녀의 뿌연 형체가 걸어오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생명이 한순간에 되살아나는 듯했으며, 내 눈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서 다른 것들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녀 주변의 모든 것들은 그녀의 우아하고 매혹적인 모습에 흡수되어 모든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른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오래된 빌라의 무리들은 그녀의 한 줌 허리께로 자취를 감추었고, 낮은 지붕을 이고 늘어서 있던 자동차 공장들은 그녀의 날씬하고 길고 가느다란 손짓에 사라져 버렸다. 왼쪽으로 희미하게 흘러내리던 검은 물줄기도 그녀의 우아한 발걸음에 흐름을 멈추었다. 마치 이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추어 선 듯했다. 생명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려 영혼까지 악마에게 내어준 듯했다.


그녀의 보기 좋게 도드라진 하얀 이마 위로 봄바람이 스치듯 흩날렸다. 가늘고 길게 이어진 눈썹 아래로 크고 아름다운 두 눈은 오뚝하고 예쁜 콧날을 사이로 조화롭게 자리하고, 다소 육감적인 입술은 전체적으로 매력적이고 섹시하기까지 했지만 전혀 세속적이거나 퇴폐스럽지 않은 묘한 세련미를 풍겼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아직도 발레리나인 듯 품위 있고 새의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노란 원피스는 플리츠가 들어간 섬세한 디자인으로 그녀의 청순하면서도 육감적인 매력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먼로가 그랜드센트럴역의 통풍구에서 바람에 흩날리던 하얀 드레스와 몹시 닮았다. 그녀의 우아하고 섹시한 매력과도 아주 많이 닮았다.


그녀는 경망스럽지 않은 멋진 걸음걸이로 얼마간 걸어오더니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우아한 손짓으로 목에 두른 실크스카프를 풀어 왼팔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걸쳤다. 그녀의 가늘고 하얀 목덜미에 진주목걸이가 수줍게 빛났다. 진주목걸이는 그녀의 창백하고 하얀 피부와 어울려 섬세하고 아름답게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그녀의 풍성한 웨이브진 머리칼은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 언저리에서 목덜미 언저리에서 여전히 봄바람에 미세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숨조차 멈출 만큼 놀란 나는 동시에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한 두 가지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의 달콤한 미소와 우아한 손짓, 마치 꿈처럼 몽롱하고 부드럽게 말랑말랑해서 신비롭기까지 한 이 순간에 이미 냉정함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먼로를 닮은 그녀는 그렇게 또각또각 용수철 위의 젤리 같은 구둣발 소리를 내며 이 층집 여자가 되었다가 슈가가 되었다가 로렐라이가 되어 점점 더 팽창해서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나의 텅 빈 동공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아버지의 두 번째 여자 친구다.

물론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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