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소중한 존재야, 오늘 하루도 잘 살아가렴.
아파트 상가 작은 마트 빵 진열대에서 보름달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던 곳이었는데, 그 순간 내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고,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며, 가슴속이 뜨끈한 포장마차 가락국수 국물을 들이켰을 때처럼 따뜻해졌고,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나는 보름달 두 개를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진열되어 있는 다른 종류의 빵들을 종류별로 모조리 살펴보았다. 내가 찾던 그 빵은 없었다. 몹시 아쉬운 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한동안 애꿎은 빵들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 아버지는 목장을 하셨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아침, 들판에는 이슬이 반짝이고, 초록색으로 물든 넓은 목초지에는 하얗고 검은 무늬의 젖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소들은 느긋하고 여유롭게 움직이며 서로를 바라보거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멀리에는 낮은 구름과 나지막한 산이 둘러싸고 있고, 농장 한편에는 붉은 지붕을 가진 외양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외양간에서는 건초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와 처마 밑의 풍경을 울려대고, 독일계 셰퍼드가 느긋하고 활달하게 풀밭 위를 뛰어다녔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둥둥 떠있고, 새들은 지저귀며 푸르고 청아한 맑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다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 형제들 머리맡에는 영락없이 크림빵과 날씬한 유리병에 담긴 우유가 함께 놓여있었다. 아버지 손바닥 만한 큼지막하고 바삭한 빵 위에 설탕을 녹여서 만든 시럽이 얼기설기 줄눈 모양이거나 덩어리째 듬뿍 뿌려져 있어, 설탕 알갱이가 아삭아삭 씹히기도 하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맛있었던 크림빵.
우리는 송아지음매 소리를 들으며, 새둥지 머리에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잠옷 차림으로, 다른 형제들의 크림빵과 내 크림빵의 크기를 흘끔거리며 먹곤 했었다.
부드러운 크림의 사각거리는 달콤함과, 신선하고 따뜻한 우유의 고소함과, 결코 말로 표현하지는 않으셨지만 아버지의 따스하고 포근한 사랑과 함께, 창 밖에서 스며드는 익숙하고 친숙한 냄새들이 합쳐져 매일매일의 아침은 따스하고 사랑스럽고 평화롭게 느껴졌었다.
매일 아침, 머리맡에 놓여있는 크림빵과 따스한 우유는
"너는 소중한 존재야. 오늘 하루도 잘 살아가렴.' 하는 아버지의 말없는 응원처럼 여겨졌다.
고소했던 크림빵 냄새, 손끝에 느껴졌던 크림빵의 부드러운 감촉, 혀 끝에 달콤하게 스며들던 사랑스러운 맛은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넘치는 아버지의 사랑에 행복했다. 아마도 그때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행복감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는 조용한 힘이었을 것이다.
긴 하루가 지나고 언덕 저편에 석양이 들판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바람의 감촉이 살짝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목장 사이에 나있던 경사진 흙길을 기분 좋을 만큼의 땀과 발끝에서 나풀대는 흙먼지와 함께, 숨을 헐떡이며 뛰어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하루의 끝을 정리하며 안락한 나의 집으로 향하는 작은 의식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 너머에 있을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사랑하는 가족들, 포근하고 안락한 잠자리, 크림빵과 따뜻한 우유.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이 시간들이 천국이 있다면 아마도 이럴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품은 마치 천국 같았다. 세상의 어떠한 소음도 닿지 않는 안식처 같았다. 그곳에는 두려움도 어두움도 외로움도 없었다. 모든 순간들이 내게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천국이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모든 것을 가졌던 것 같다. 그 따뜻함이, 그 고요함이, 그 사랑이 내게는 천국이었다. 아버지의 존재만으로 세상이 따뜻해졌고, 나는 그 품 안에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안식을 느꼈다.
간혹, 경사진 길을 뛰어내려오다가 흙이 움푹 파인 곳이나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져서, 무릎과 팔다리가 쓸리고 까져 피가 흐를 때면, 행여 아버지한테 혼날까 봐 몰래 외양간으로 스며들어, 임자 없는 구유속에 몸을 숨기고, 이 난감함을 어찌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작은 몸을 구유 속에 쏙 집어넣고, 볏짚 냄새에 파묻혀 놀다 보면 걱정은 저만치 사라지고, 엄마의 품속처럼 더없이 아늑하고 포근하고 편안했다. 송아지들의 정겨운 숨소리와 외양간 나무 틈 사이로 햇살이 살며시 들어와 머무는 그 공간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나의 작은 세계 비밀스러운 안식처였다.
문득문득 아득한 그리움이 찾아드는 건, 그 시절의 시간들이 내게는 천국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너무도 행복했었다는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로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그 시절 그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과 따스한 평화로움과 들판을 뛰놀던 자유로움을 가득 품은 아름다운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집도, 기억 속에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 모든 기억들이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하면서도 강렬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뜬금없이 흔들리기도 할 때, 아버지가 주셨던 넘치는 사랑이 마음속 내 심연의 깊은 곳에서 명명할 수 없는 보석의 강인함으로 이겨낼 수 있으니 말이다. 삶을 지탱하는 조용한 힘이었다.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필요한 순간마다 내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말을 걸어오는 감각이다.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면, 아버지가 바람처럼 온기로 내게 온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평화로운 아침이 내 안 깊은 곳에서 다시 불을 지피는 것이다. 결정의 갈림길이나 슬픔이 밀려드는 밤이면 말없이 등을 토닥이며, '넌 그때처럼, 괜찮을 거야.'라고 속삭이며 조용히 손을 마주 잡아 주셨다.
다른 사람을 향한 친절과 배려와 이해심에 나만의 선함과 따뜻함이 담겨 있다면, 그건 사실 아버지에게 배운 방식대로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완전하고 조건 없는 그 사랑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기준이 되고, 방향이 될 것이다.
어쩌면 내 삶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삶 전체를 조용히 감싸는 숨겨진 천국의 지도일지도 모른다. 그 지도는 내가 길을 잃을 때마다, 마음의 나침반이 되어 따뜻한 곳으로 나를 이끌어 줄 것이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게는 암울했을지도 모를 순간들이 내게는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천국으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문득, 못 견디게 아버지가 그립다.
설탕 크림이 사각거리는 크림빵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