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거리마다 빨간색 구세군 냄비와 종소리가 등장하고 지나던 사람들은 주머니를 뒤져 작은 동전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수줍은 미소와 함께 기부했다. 유명한 가수들의 신나는 겨울 노래와 캐럴이 거리마다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마냥 걷기만 해도 연말을 느낄 수 있었다.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의 등장으로 거대한 팬덤이 생겨났고 소녀팬들은 색깔로 서로가 누구의 팬인지 구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앨범이 발매되는 날이면 가게 앞에는 아침부터 줄을 서고 드림 콘서트를 하는 날이면 학교에서 조퇴금지령이 내려졌다.
부산 사는 소녀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팬클럽에서 마련한 관광버스를 타고 부모님 몰래 서울로 가 십만 명의 팬들 사이에서 각자의 가수를 위해 열심히 풍선을 흔들며 응원하고 새벽에 부산으로 돌아오는 힘든 여정임에도 소녀들은 멈추지 않았다.
둘째 영진은 엄마, 아빠의 저녁 모임으로 인해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모임 가시기 전 집에 들러 이것저것 시키신 일이 있었지만, 영진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몇 달 전 학교를 빠지고 드림 콘서트에 가려고 관광버스가 있는 서면역으로 가는 길에 아빠에게 발각되어 심하게 혼이 나고 집으로 끌려가 아쉽게 보지 못한 드림 콘서트 녹화영상을 연말이라 티브이에서 방송을 해준다고 하여 기다리던 중이었다.
“영진아. 니 아까 엄마가 하라는 숙제 다 했나?”
“언니야. 안 해도 된다. 어차피 엄마 또 까먹고 검사도 안 한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난 분명히 니한테 얘기했다? 또 엄마가 내보고 니 숙제 안 챙겼다고 뭐라 하면 니가 솔직하게 말해라. 알았나.”
“알았다. 젝키 보고 나서 바로 할게. 언니 안 볼거가? 곧 있으면 나온다는데?”
“내 숙제 다 하고 갈게.”
영진은 언니 미진이 답답했다. 엄마, 아빠가 없는데도 굳이 지금 숙제를 하다니.
게다가 내년이면 2000년이라 올해를 마지막으로 지구가 종말을 한다는데 며칠 남지 않은 시간을 숙제나 하면서 보내다니.
막내 유진은 아직 초등학생이라 숙제는 없고 연예인을 좋아하지도 않아 집에서 공놀이를 했다.
요즘 배구에 빠진 유진은 하루 종일 집에서 두 손을 모아 배구공을 위로 튀기며 시간을 보냈다.
“유진아. 시끄럽다고. 나가서 해라.”
티브이 소리가 잘 안 들린다며 마당으로 쫓겨난 유진은 추운 날씨에도 배구 연습을 계속했다. 엄마, 아빠가 모임을 나가신 덕분에 편하게 배구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유진이 학교에서 배구를 접한 이후로 거의 모든 시간을 배구 연습하며 지내자, 아빠는 유진의 배구공을 뺐었다. 하지만 배구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용돈을 모아 아빠 몰래 작은 공을 사놓고 아빠가 일하는 시간에 몰래 연습했기에 늘 조마조마한 유진이었다. 그날도 마당에서 연습하며 귀는
언제 열릴지 모르는 대문에 집중했다.
엄마의 구두 굽 소리가 대문 가까이에서 멈추는 소리가 들렸고 유진은 공을 잡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언니들에게 신호를 줬다. 유진이 집으로 뛰어 들어오자, 언니들은 티브이를 끄고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아빠,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아이들은 처음부터 방에 있다 나오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방을 나섰다.
“다녀오셨어요.”
셋은 인사를 하며 아빠의 굳은 표정에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만 따로 방을 쓰는 막내 유진이 언니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왜인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언니야. 내 여기 조금 있다가 갈게.”
영진도 이럴 때는 한 살 차이지만 언니 미진을 의지하며 집안의 차가운 공기가 빨리 끝나길 기다렸다.
“언니야. 엄마, 아빠 또 무슨 일 있는 것 같제?”
“조금 늦으신다더니 생각보다 일찍 오고 아빠 표정도 이상하드라.”
미진과 영진은 문에 귀를 대어 건너편 안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때 화가 잔뜩 난 아빠의 높은 데시벨의 목소리가 들렸고 엄마의 한숨 섞인 억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대화가 오고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늘 싸움의 시작은 비슷했다.
그래도 오늘은 던질 유리그릇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몇 달 전 미진은 아빠가 혼자 식사 중에 엄마와 대화하다 뭐가 기분이 나쁘셨는지 밥상을 뒤엎어 그릇들이 여기저기 구르며 흩어졌고 몇몇 그릇은 서로 부딧혀 깨져버렸다. 꼭 부모님처럼 .
국그릇에 담겨있던 국물이 쏟아져 바닥이 축축하고 흥건했다. 미진의 눈에는 항상 아빠에게 당하는 엄마가 불쌍해 보여 둘의 싸움이 끝나면 뒷정리를 종종 도와주었다. 그날도 위험하다고 놔두라는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걸레를 집어와 바닥에 쏟아진 국물과 반찬들을 정리하다 깨진 유리 조각이 발가락을 스쳐 피가 났다. 피를 보며 놀란 미진은 아픈 발가락보다 자신의 신세가 너무 한심스러워 울었다.
마치 안방에 있는 아빠가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더욱 서럽게 울었다.
미진은 항상 의문이었다. 화가 나면 감정 조절을 못 하는 아빠인데 엄마는 왜 아직도 그걸 몰라 항상 같은 패턴으로 싸우는지, 아빠의 감정은 왜 늘 뾰족하게 솟아 상대방을 향해 다 표현해야 끝이 나는지.
저렇게 싸우고 나면 아빠는 항상 미진을 불러, 하는 얘기가 있었다.
“너거 엄마랑 더 이상 못 살겠다. 너희들이 크면 아빠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게 될 거다.”
"도저히 너거 엄마랑 못 살겠다."
미진은 알고 있었다.
아빠가 늘 못 살겠다고 하지만 막상 이혼 할 베짱은 없다는 것을.
지긋지긋한 미진은 그의 속마음 테스트를 하고 싶어졌다. 아빠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혼하세요. 우린 상관없어요.”
아빠는 노발대발했다.
어떻게 부모에게 이혼하라는 얘기를 할 수 있냐며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냐고 또 엄마 탓을 했다.
미진은 점점 미진의 부모를 의지할만한 어른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온 엄마, 아빠의 차가운 분위기를 느낀 아이들은 그 분위기가 곧 실제상황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안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미진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고 불안해하는 동생들을 다독였다. 소리치는 아빠와 억울한 엄마의 목소리.
잠시 뒤 엄마의 카랑카랑한 따지는 말투. 때리는 소리. 보통은 여기까지가 싸움의 순서인데 오늘따라 때리는 소리 뒤에 정적이 흘렀다.
미진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미진 방의 방문을 열었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더 불안해졌다. 나가려는 동생들을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일러둔 뒤 미진은 안방 문 가까이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다.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진은 아빠에게 크게 혼날 각오를 하고 안방 문을 열었다.
그때 미진의 눈에 비친 모습은 충격이었다. 엄마를 해하는 아빠의 모습이 그렇게나 잔인할 수가 없었다.
색이 변한 엄마의 얼굴, 새빨개진 눈, 고통스러움에 휘두르는 팔, 힘을 잃은 다리. 아빠는 짐승이었다.
미진은 소리쳤다. 그렇게 알려서 아빠의 손이 멈추게 만들어야 했다. 미진은 그 순간 동생들이 보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수철이 외삼촌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전화를 받은 수철이 삼촌은 곤란해하며 집으로 오지 않았다.
태연하게 마당에서 담배 피우는 아빠의 모습에 증오를 느낀 미진은 커서 아빠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아빠는 집을 나갔다. 갈 곳 없는 아빠가 겨우 찾은 곳이 식당이었다. 덕분에 식당은 며칠 동안 문을 닫았고 그곳에서 아빠는 단식투쟁을 했다. 엄마는 날마다 밥을 챙겨 아빠에게 찾아가 사과했다.
옹졸하고 더럽고 치사한 방법으로 상대방의 사과를 받아내는 수법이었다. 엄마는 미진에게 아빠가 저러다가 굶어 죽을까 봐 겁이 나니 대신 밥을 들고 아빠를 찾아가라고 했다.
사실 미진은 아빠가 굶어 죽어도 슬프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마음 편하게 살 것 같았다.
아빠가 식당에서 투쟁하는 기간 동안 집에 있는 미진의 불안이 조금은 사라졌다.
며칠 뒤, 하교 후 집으로 간 미진은 현관에서 아빠 신발을 발견하고 또다시 전쟁이 시작될까 봐 집에 있는 동안 자면서도 불안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안방 문이 열리거나 닫히거나 할 때는 눈이 번쩍 떠지는 미진이었다. 아빠가 집에 돌아온 후 집안의 공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아빠는 소왕국이 아니라, 온 우주의 왕이 되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완전한 승리를 안겨주었고, 아빠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엄마는 그날 이후 더 이상 아빠에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드는 일은 없었다. 아빠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엄마는 무조건 죄송하다는 말로 끝을 냈다. 자식이 셋이나 있었지만 그들의 나라에 백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족, 뿌리, 유교, 조상의 중요성을 언제나 중요하게 가르치던 아빠였는데 아빠에게 가족이란 뭘까.
아빠에게 가족이란 본인에게 순종하는 사람만이 가족이었는지 미진은 묻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