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제법 추워져 찬바람에 코끝이 시릴 정도였다.
정란과 봉식은 저녁 시간에 동네 상인회에서 주최하는 송년회가 있어 가게 문을 일찍 닫았다.
이렇게 일찍 문을 닫는 경우는 일 년에 딱 하루였다.
정란은 하루 매출도 아까워 송년회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봉식은 상인회를 알아둬서 나쁠 것 없다며 가입을 권유했다.
사실 정란은 부부 모임이 달갑지 않았다. 별난 봉식의 성격을 동네에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찍 가게를 끝내고 집에 들어가 기름 냄새를 없애고 다녀오고 싶었는데 별안간 봉식의 눈치가 보여 멈칫하는 정란이었다.
“저 좀 씻고 가도 됩니꺼? 기름 냄새가 나서..”
“씻고 가자. 일 년에 하룬데 깨끗하게 가서 보여줘야지.”
봉식은 유난히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신경 썼다. 본인의 옷차림은 물론 정란의 옷까지 본인의 취향대로 골라놓고 신경을 썼다.
연보라색 트위드 조직으로 짜여진 투피스 정장이 옷걸이에 걸려 방문 손잡이에 매달려있었다. 그 옷은 몇 년 전 결혼기념일이라 봉식이 준 깜짝 선물이었다. 정란은 그 옷을 스스로 꺼내어 입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봉식은 오늘 같은 행사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꺼내어 정란이 입기를 은근히 강요했다.
어릴 때부터 남자 형제들 틈에서 자라고 운동을 했던 탓에 봄가을겨울엔 긴바지, 여름엔 반바지 인생이었는데 봉식이 사 온 무릎까지 오는 투피스는 정말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렇다고 거절했다가는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상이 가능한 봉식이라 정란은 단 하루인 오늘은 그저 따라주기로 했다.
투피스를 입은 정란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렇게 보면 찌짐 굽는지 아무도 모르겠다며 활짝 웃는 봉식이었다.
상인회에서 이야기한 식당으로 도착한 둘은 안내한 자리에 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장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며 가며 낯이 익은 사람도 있고 전혀 처음 보는 분들도 있었다. 상인회 회장님의 인사 말씀을 시작으로 행사가 진행되었고 올해의 신규 회원 인사와 운영비 정산에 대한 발언이 끝나고 회원들은 음식과 술과 음료수를 나누어 마셨다. 또 사장으로서 가게를 운영하며 느끼는 각자의 고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란의 옆에 앉은 옆 골목 귀금속 집 여자 사장님은 30대 중반의 노처녀였다.
그녀는 수줍던 처음과는 다르게 술이 약간 들어가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정란과 봉식을 보며 살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근처 찌짐 집 하신다고요? 지나가다 몇 번 뵀어요. 아우, 밖에서 이래 보면 누가 찌짐 굽는다고 알겠어요? 오늘 참 이쁘시네요, 호호호.”
교양이 넘치는 여자 사장님은 억양은 경상도 억양이지만 최대한 사투리를 빼고 말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칭찬인 듯 아닌 듯 묘한 기분을 느낀 정란은 고맙다는 의미로 웃으며 가벼운 목례를 하였다.
“두 분은 24시간 붙어 계시면 힘들지 않아요? 사이가 너무 좋으셔서 싸우실 일이 없나 보죠? 호호호.”
봉식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애들 엄마랑 결혼하려고 얼마나 쫓아다녔는데요. 싸우긴요. 시간 아까워서 못 싸웁니더. 하하하.”
“어머, 하긴 진짜 그래 보여요. 우리 여자 사장님 빠질 인물이 아니라서 어디 가도 시집을 잘 갔을 텐데 의외긴 하네요. 사장님. 부인한테 진~~ 짜 잘하셔야겠어요. 호호호호호. 저 화장실 좀...”
봉식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봉식의 눈치를 보던 정란은 저 사람이 술이 좀 취한 것 같다며 신경 쓰지 마라고 이야기하고 화장실에 갔다. 볼일 보고 나오는 정란을 기다린 귀금속 여자 사장은 비틀거리며 다시 한번 정란에게 무례하게 이야기하였다.
“사장님. 진짜 솔직하게 말해봐요! 어쩌다가 저런 남자랑 결혼하게 된 거예요? 인물이 아깝다 아까워. 사장님 내가 진짜 안타까워요.”
정란은 술 취한 사람이랑 무슨 말을 섞나 싶어 나가려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안경집 여자 사장님이 귀금속 사장님의 이야기에 반응하며 맞장구치는 모습에 살짝 불쾌해졌다.
“애들 아빠가 자상해서 결혼했습니더. 애들한테도 좋은 아빠구요. 뭐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합니꺼?”
막상 사람들이 봉식의 겉모습으로 판단하니 결혼 후 무섭던 봉식이 오랜만에 불쌍해졌다.
정란은 얼른 테이블로 와 봉식을 찾았고 그는 다른 테이블에서 사람들과의 대화에 한창 빠져 있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봉식은 맨 정신이었고 주변에는 거나하게 취한 남자 사장님들이 서넛 있었다.
“사장님. 말씀을 이리 잘하시는지 오늘 처음 알았네요. 한동네 사는데 앞으로 우리 자주 뵙고 친하게 지냅시더.”
“맨날 가게에만 계셔서 몰랐는데 아는 것도 많으시고, 앞으로 상인회 발전을 위해 도움 많이 주십시오. 자주 만납시더. 우리.”
봉식은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듣고 싶던 인정을 받아 기분이 묘했다. 그동안 책으로 지식을 쌓은 덕이 이제야 빛을 보는 것 같아 자세까지 고쳐 바르게 앉았다.
봉식네 가게에서 열 발자국만 가면 나오는 노래방 사장님이 걸걸한 목소리로 봉식을 반겼다.
“안 그래도 사장님 뵙고 싶었어예. 요즘같이 이 어려운 시기에 가게 차리신다기에 속으로 걱정했드만, 제가 괜한 걱정 했다아입니꺼. 문 열자마자 손님들이 바글바글~ 여자 사장님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해서 가서 먹었거든요? 와~~ 사장님! 내 그날 집에 있는 우리 마누라한테 미안하지만, 매일 이 음식을 드시는 남자 사장님 부러웠는데 그분이 바로 봉식 사장님이셨네요! 아니 거기다가, 세상에. 여자 사장님 미모까지 출중하시고. 와~ 우리 봉식 사장님 진짜 다 가졌네요! 아이고 부러브라. 자, 부러운 우리끼리 한잔합시더. 하하하.”
“아이고 이렇게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봉식의 웃음이 어색하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정란은 귀금속 사장님의 오지랖에 불쾌해져 봉식에게 다가가 아이들 핑계를 대고 집으로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봉식과 이야기를 나누던 술이 거나하게 취한 노래방 사장님이 정란에게 술 한잔을 권했다.
“찌짐 사장님. 여기 한잔만 하고 가이소.
지금 봉식 사장님이 술 한 잔이라도 입에 대면 119 실려가신다고 한~~~ 잔도 안 드시고 지금껏 우리만 마셨습니더. 찌짐 사장님이 대신 한 잔이라도 드시고 가이소. 하하하.”
곤란한 정란은 봉식을 쳐다봤고 봉식은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맥주컵을 정란에게 넘겨주었다. 노래방 사장님은 정란에게 술을 가득 따랐고 정란은 한 번에 끝까지 마셨다. 봉식과는 다르게 정란은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 않아 맥주 정도는 가벼웠다. 그런 정란을 본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노래방 사장님은 정란에게 또 한 잔을 가득 따랐다. 옆에서 봉식은 아직도 인자한 웃음으로 정란을 쳐다봤고 정란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또 한 번에 다 마셨다. 아까 귀금속 여자 때문에 속이 상하기도 했었고, 한 잔 마시고 싶은 타이밍이었는데 딱히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란이 이제 집으로 가려는데 봉식이 같이 일어났다.
“사장님. 저희 애들이 집에 지들끼리 있어서 걱정이 됩니더. 우리 이만 가볼께예. 다음에 또 좋은 자리 있으면 불러주이소. 먼저 가보겠습니더.”
밖으로 나온 봉식은 말 한마디 없이 집으로 빠르게 걸었고 정란은 봉식이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나와서 인사를 하다 봉식의 표정을 살피고는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봉식은 정란을 안방으로 불렀다. 그의 날카롭고 날이 서 있는 억양에 정란은 긴장되기 시작했다.
“니 준다고 그걸 다 먹고 앉았나?”
“맥주말입니꺼? 그거 한두 잔 나는 음료수아입니꺼? 알잖아예.”
“누가 니 취할까 봐 물어보나? 남자가 주는 그 술을 니가 왜 곧이곧대로 먹냐 이말이다. 안 먹는다고 거절해야지. 그걸 또 좋다고 마시고 앉았냐고.”
“누가 좋아서 마십니꺼. 다들 기분 좋아서 계시는데 그럼 거기서 거절이라도 하면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미진 아빠가 나한테 먹으라고 맥주잔 준거 아니었어요?”
“거절하면 뭐가 이상한데? 니는 그냥 남자가 따라주는 술이 좋았던 거다. 아니가?”
“남자는 뭐가 남잡니꺼. 또 이상한 상상 그만하이소. 피곤합니더.”
“뭐? 피곤? 피곤? 지금 누가 피곤하게 만들었는데. 니가 처신을 잘해봐라. 내가 이런 말 할 이유도 없다.”
정란은 오늘따라 그의 말에 숨이 콱 막혀왔다. 그가 과연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 걸까. 아니, 이게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부분이 기분이 상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블랙홀같이 빠져나올 수 없는 그의 되돌이표. 정란은 너무 지겨웠다. 매 순간순간 그의 눈치를 살피고 그의 말투, 억양, 표정까지 체크하며 긴장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밖에서는 사람 좋은 웃음을 하고 집으로 와서는 어느 작은 소왕국의 최고 권력자인 듯한 저 인간의 거만함, 사악함이 싫었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까 봐 참아온 정란은 그마저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졌다.
정란은 터져버렸다.
“처신예? 처신? 내가 처신 못한 게 뭐 있습니꺼! 말해보이소.
먹으라고 맥주잔 넘겨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남자니 뭐니 그딴 얘기가 왜 나오냐고예!
내가 그 사장님하고 뭐 대화라도 한마디 했습니꺼? 무슨 맨날 남자, 남자, 남자.
내가 진짜 만나보고 이런 얘기 들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아무것도 없이 일만 하는 내한테 와 이랍니꺼.
말해보소. 하루 종일 내하고 같이 있는데 내가 의심 가는 행동 했습니꺼, 안 했습니꺼. 예? 제발 좀 그놈의 남자, 남자. 지겨워죽겠어예. 그만 좀 하이소. 진짜!!”
정란의 쏘아붙임에 봉식은 점점 흥분되어 손이 떨렸다.
“니 지금 말 다했나? 소리 질렀나? 남자한테 미쳐서 술이나 쳐 받아먹는 주제에 니가 지금 잘했다는 거가?
본디 천하게 자라서 모르는 거가? 이게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그래. 내 미쳤다. 그만 좀 하라고. 그만!!
지겹다고. 남자 얘기 그만하라고!!!”
쫙-
봉식이 떨리던 손으로 정란의 뺨을 가격했다.
쫙-
정란도 참지 않았다. 배구를 그만둔 이후로 처음으로 손바닥에 힘껏 힘을 주었다.
봉식의 눈이 순식간에 변했다. 날짐승의 눈을 한 그는 다리로 정란을 밀쳐서 넘어뜨렸다. 중심을 잃은 정란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 봉식을 쏘아봤다. 봉식은 그대로 정란의 상체 위로 올라 그녀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정란은 봉식의 옷을 잡아 그를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동안 봉식이 의심하고 트집을 잡을 때마다 덩치 작은 봉식을 한 번에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막상 실제상황이 벌어지니 정란이 아무리 애를 써도 돌덩이처럼 무거워 벗어날 수 없었다. 눈이 완전히 돌아버린 봉식이 정란의 뺨을 때리며 외쳤다.
“남자들한테 꼬리 치고, 어디 술집 여자나 할 짓을 하고도 이게 지금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죽은 니 애미가 그렇게 가르쳤나!!!”
“미친 건 니다. 자격지심에 둘러싸여서 니 인생 니가 갉아먹고 있는 거다.
어머니? 입에 함부로 올리지 마라. 니 따위가.”
봉식은 정란의 얘기가 끝나자 때리기를 멈추고 정란과 눈을 맞추었다. 그동안 알던 정란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겁을 주고 경고만 날리려 했는데 정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동안 말없이 봉식의 이야기를 피하던 정란이 아니라 속으로 담아뒀다는 기분에 겁이 났다. 자신의 의심에 확신이 필요했던 봉식은 이제는 확신 따위 필요 없었다.
정란을 꺾어야 했다.
나오라며 발버둥에 소리치는 정란의 상체 위에 앉은 봉식은 그가 사준 그녀의 투피스 재킷을 잡고 양쪽으로 힘껏 뜯었다. 촘촘히 닫혀있던 단추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지고 속에 입은 티셔츠가 보였다. 그는 그녀의 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힘을 주었다.
그녀가 손톱으로 그의 등을 세게 긁으며 다리는 바닥에서 동동 굴렸다. 스타킹을 신은 탓에 발바닥은 자꾸 미끄러졌고 더 이상 힘을 주기가 힘들어 다리를 일자로 뻗었다. 숨을 쉬지 못해 고통스러운 그녀의 얼굴이 점점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두 눈은 빨개졌다. 오른쪽 눈 옆 관자놀이에는 푸른 핏줄이 힘껏 솟아있었다. 봉식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정란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란이 손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렸다.
첫째 미진이었다.
“아빠!!!”
그 소리에 봉식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뺐고 숨이 돌아온 정란은 몇 번의 기침을 내뱉고 수철이 외삼촌에게
어서 전화하라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