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보상

by 송화

정란은 사춘기 딸들에게 못 볼 꼴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그 일에 대하여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말주변이 없던 정란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을 내야 할지 도무지 어려웠다.

이대로 넘어가고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힐 거라 생각했다.

딸들이 눈치는 좀 보는 것 같아도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했고 그 후로는 식당 일이 바빠 까맣게 잊었다.

봉식의 의심은 여전했고 감정 조절을 못 해 화도 냈지만, 정란은 딸들을 위해 더 추한 꼴은 보이기 싫어 참기로 했다.

정란이 대들지만 않아도 지난번처럼 봉식이 이성을 잃고 미치진 않으니, 정란은 거기까지는 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참으며 살다 보니 어느덧 첫째 미진의 대학 수능 날이 다가왔고 드디어 집안의 첫 대학생이 되었다.

정란은 미진에게 늘 미안했다.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낳은 딸이었고 또 바로 둘째를 가진 통에 첫째에게 신경을 못 썼다.

뒤돌아 생각해 보니 동생들에게 양보와 사과를 강요했던 것 같았고, 장녀라는 이유로 쓸데없는 책임감을 심어준 것 같았다.

예전엔 그게 맞는 줄 알았는데 다 키워 놓고 보니 지나간 그 시간이 참 후회되었다.

언제나 밝고 집안의 개그맨 역할을 하던 둘째도 대학을 가고 몇 년 뒤 막내의 대학 입학까지 끝이 났다.

정란은 세 딸이 건강하게 잘 자라 사회로 나가면 그들의 보호자 역할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첫째 미진은 대학 졸업 후 작가 지망생으로 지냈고, 둘째 영진은 여러 번의 도전 끝에 면접과 시험을 거쳐 당당히 은행원이 되었다.

셋째 유진은 배구에 푹 빠져 배구선수로 진로를 정하고 싶었지만,

봉식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사범대를 졸업 후 체육 선생님이 되었다.

정란은 첫째 미진이 늘 걱정이었다.

매번 공모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주눅이 들어 집으로 오는 아이가 혹시나 이대로 주저앉을까 봐 겁이 났다.

동생들과는 달리 기회가 와도 잡기를 주저하고 뚫고 나가려는 용기도 없어 보여

부모로서 도움을 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봉식은 차라리 빨리 시집을 보내는 방법이 나을 것 같다며 동네에 이리저리 미진을 소개했다.

밖에서는 사람 좋은 웃음을 하고 지식이 많아 보이는 봉식 덕분인지 미진을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집안은 많았다.

조상님께 정성을 다하는 부모님을 보며 배운 게 있을 것이고, 또 분명히 엄마를 닮아 음식 솜씨도 좋을 것 같고, 미모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싫다는 소리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살며 빨리 커서 독립을 꿈꾸던 미진은 결혼마저 부모에게 휘둘리기 싫어 선 자리가 들어와도 다 거절했다.


어느 날, 처음으로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 미진을 본 봉식은 안방으로 불렀다.

“왜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고 다니는데. 동네 창피하게.”

“아빠는 내가.. 그렇게.. 부끄럽나... 내가 쫌.. 힘들어서 먹었다..”


봉식을 닮아 술이 약한 미진은 그렇게라도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싶었다.

하지만 봉식이 그걸 넘어갈 리가 없었다.

“니가 지금 하는 것도 없는데 힘들긴 뭐가 힘든데! 세상천지 니처럼 놀고먹으면서 힘들다는 사람 첨 봤다.”


미진과 봉식은 서로가 답답했다.

“아빠는!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나. 아빠가 뭘 아는데! 얼마나 숨 막히는지 아나!!”

술기운에 묵은 감정이 툭 튀어나온 미진을 봉식은 가만두지 않았다.

어디서 어른한테, 부모한테 버릇없이 대드냐며 미진이 가지고 다니는 책가방을 잡아 던지고 때렸다.

봉식이 스스로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야 멈춘다는 걸 알기에 정란은 옆에서 말리지도 못하고 미진에게 소리만 쳤다.

“빨리 아빠한테 잘못했다고 해라!”


미진은 입을 다물고 봉식의 폭행이 끝날 때까지 맞고 기다렸다.

미진은 이 상황이 고마웠다.

더욱 봉식을 미워할 이유를 찾게 해 줘 고마웠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미워한다는 게 그 얼마나 혼란한 마음인지, 평생을 죄책감, 자책에 시달릴 텐데 이렇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게 해 줘 고마웠다.

둘째 영진은 취업한 은행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우수사원이 되어 표창과 성과급을 받았다.

무려 부산, 경남 지방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자기 일을 사랑했고 성격이 싹싹하여 은행을 찾는 어르신 고객들에게 이쁨 받고, 그분들은 영진이 적금 설명을 하면 홀린 듯이 적금 통장을 만들고 계셨다.

그 덕에 영진은 회식 때마다 지점장님의 칭찬을 듬뿍 받았고 몇몇 여직원들의 시기심도 같이 샀다.

그들의 소리 없는 질투를 느낄 때마다 영진은 오래 사귄 남자 친구와 마음 맞는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은행에서 한 번 우수사원의 맛을 본 영진은 이후로도 더욱 일에 매진하였다.

오전, 마감 회의 때마다 실체 없는 압박이 있었고 영진은 열심히 하고 싶었다.

빨리 승진도 하고 싶었고 더욱 인정받고 싶었다.

만나는 고객마다 적금, 펀드, 카드 등의 가입 권유를 했고 성과도 꽤 있었다.

봉식에게 부탁해 상인회에 찾아가 은행 가입을 부탁드렸다.

영진은 또다시 우수사원이 되었다.

이번에는 본사에서 내려오셔서 영진에게 표창과 성과급을 주었다.

은행에 들어간 뒤 연달아 달콤한 꿀을 먹은 영진은 다음에 우수사원이 되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렇게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영진은 마라톤이 아닌 100미터 단거리 선수처럼 달렸다.

셋째 유진은 착했다.

막내로 태어나 부모에게 사랑도 많이 받았고, 봉식이 원하는 대로 책을 가까이했고, 학교에서 줄곧 반장도 하며 정란에게 첫째, 둘째와는 또 다른 기쁨을 안겨줬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고 한 문제라도 틀리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성적에 욕심도 있었고 봉식, 정란은 그런 유진에게 기대를 많이 했다.

유진은 몸이 날렵해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딸이었다.

초등 고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배구를 접한 유진이 어느 날부터 집에서 책 보다 공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정란은 과거 자신이 어릴 적 좋아했던 배구가 몇십 년 만에 떠올랐고 혹시 유진이 그 길로 빠질까 봐 신경이 쓰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유진이 어디서 들었는지 배구부가 있는 중학교를 가고 싶다고 봉식에게 의논했다.

유진의 진지한 눈빛을 본 봉식은 제안했다.

“곧 학교 시험 있제? 반에서 일 등 하면 생각해 볼게.”


철석같이 믿은 유진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정말 다음 시험에 일 등을 했다.

봉식은 자신의 제안을 바로 거두었다.

“생각해 본다고 했지. 보내준다고는 안 했다. 운동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나?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려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프로팀에 입단이 될까 말까다. 입단해도 이름을 날리는 건 하늘에 별따기다. 함부래 운동할 생각하지 말고 공부해라.”


유진의 인생 첫 허망함이었다.


그 후로 유진은 공부가 싫어졌고 마음은 늘 다른 곳에 있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큰 유진은 마음 한 곳에 배구를 품고 봉식의 뜻대로 체육 선생님이 되어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정란의 가게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동네를 벗어난 지역에서도 유명해져 아침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며 먹는 맛집이 되었다.

덕분에 돈을 많이 벌어 정란은 집 주변 주택이나 빌라 등을 사 모았다.

예전 둘째가 태어나고 울음소리 때문에 쫓겨난 후 그녀는 집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 돈이 모이면 부동산 매매만 했다.


정란의 동네에 재개발 소문이 십 년 전부터 돌기 시작했다.

단지 큰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몇 년째 돌았고 정란은 그 소문이 있는 구역의 주택 몇 채를 무리해서 구매했다.

재개발이 늘 그렇듯이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고 정란이 지쳐 잊을 때쯤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주택을 팔고 받은 돈으로 정란은 오랜 꿈인 건물을 지었다.

그렇게나 알뜰살뜰 모은 정란은 드디어 건물주가 되었고 그날만큼 세상에 태어나 행복한 날이 없었다.

그동안의 모든 불행을 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정란은 식당 일이 끝나고 매일 자신의 건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며 평안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숙제는 딸들의 결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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