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겨우 스물여덟

by 송화

영진은 정란에게 물었다.

“엄마, 내 블라우스 빨아놨나? 내일 은행에 입고 가야 하는데?”

“아! 엄마가 깜박했다. 후딱 빨아서 금방 다려 놓을게.”

“내일 아침까지 안 마르면 어떡해!”

“아이다. 이 날씨에 금방 마른다. 그런데 영진아. 이제 안 아프나?”

“어. 다 나았다. 그냥 감기였는데 뭐.”

“아이고. 그쟈? 난 또 의사 선생님 얘기 듣고 놀랬다이가. 그럴 리가 있나. 금방 밥 차려줄게. 있어봐라.”

“엄마!”

정란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정란의 팔에는 링거 주사가 꽂혀있었고

누워있는 곳은 응급실 침대였다.

첫째 미진이 정란의 침대 앞에서 정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엄마. 괜찮나? 내 누군데?”


미진이 누구인지 아는 건 당연한 일인데 굳이 확인하고 싶던 미진이었다.

“미진이. 영진이는?”

“아직도 자고 있지.. 엄마 쓰러져서 깜짝 놀랬다이가.”

“영진이 다 나은 거 아니고?”

“엄마, 영진이 꿈꿨나.. 아직..”


정란은 이 거짓말 같은 상황이 꿈이길 바랐지만, 어둠의 그림자는 그리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모르겠다. 엄마 쓰러지고 나서 아빠도 이상하길래 대기실로 가시라고 했다.

원무과에서 수납 얘기해서 내가 엄마 지갑에서 카드 꺼내서 결제했다.

엄마. 정신 놓으면 안 된다.”

맏딸인 미진은 위기의 순간이 오면 늘 정란의 옆에 있었다.

오늘도 다름없었다.

“아 맞다. 아까 엄마 전화로 수철이 삼촌한테 전화 와서 내가 받았다. 지금 병원 응급실이라고 말했다.

근처에 있다고 숙모랑 같이 온다 하더라.”

링거를 다 맞은 정란은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영진의 침대로 가 살펴본 뒤 대기실로 갔다.

몸이 약한 봉식이 혹시나 잘못될까 싶어 집으로 가서 눈 좀 붙이고 다시 병원에 오라고 전했지만, 봉식은 대기실에서 잠시 앉아 있다가 응급실로 가겠다고 했다.

그때 수철과 그의 부인이자 정란의 올케인 화선이 병원으로 들어왔다.

“형님. 이게 무슨 일입니꺼. 영진이 우째 됐습니꺼. 영진이 어디 있습니꺼.”

“누나야. 영진이 왜 그런 건데? 대체 원인이 뭔데?”


정란은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수철은 정란을 대기실에 앉히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미진을 발견한 수철은 침대에 누워 있는 영진을 보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마 수철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한 눈치였다.

“미진아, 어제부터 여기 있었다면서.. 뭐 좀 먹었나..”

“괜찮다, 숙모야. 배가 안 고프다.”


간호사가 도구를 잔뜩 들고 영진의 침대로 와 직계가족만 앉아 계시고 다른 분은 잠시 커튼 밖으로 나가 달라고 했다.

간호사가 미진을 쳐다보며 설명 잘 들으셔야 한다고 했다.

간호사의 손에는 긴 튜브가 있었고 튜브와 이어진 곳에는 봉투가 있었다.

소변줄이라고 했다.

내내 겨우 참고 있던 미진의 감정은 무너졌고 눈물이 줄줄 흘러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미진 대신 화선이 들어가 영진의 몸에 채우는 작업을 배웠다.

간호사와 화선이 같이 나오자, 미진은 눈물을 닦으며 털어놨다.

“숙모야. 영진이 이제 겨우 스물여덟인데..

지금 쟤가 누워서 소변줄 찬다는 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갑자기 생기는데... 영진이 너무 불쌍해서 못 보겠다. 분명히 깨어나면 소변줄 채웠다고 뭐라 할껀데...”

“미진아. 지금 어머니, 아버지 힘드실 거다. 니가 옆에서 쓰러지시나 봐야 하니까 니라도 정신 꽉 잡고 있어라.. 아이고 힘들겠다. 영진이 빨리 일어날 거다. 기다려보자.”

어제 집에서 점심을 먹고 병원을 온 뒤 이제 겨우 24시간 정도가 지났는데 체감은 십 년 이상은 흐른 듯했다. 병실에 빈자리가 날 동안 응급실에서 며칠 정도 지내야 한다는 말에도 전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란의 친정 식구들과 봉식의 형제들이 차례로 방문하여 안타까운 표정으로 영진을 바라보다 갔고 영진은 여전히 잠만 잤다.

미진과 정란은 삼각김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고 봉식은 한 입도 먹지 못했다.

저녁이 되자 마지막으로 방문한 봉식의 형제가 봉식을 데리고 집으로 갔고 응급실에는 정란과 미진만 남았다.

“엄마.. 어제도 못 잤는데 오늘은 좀 자야 안되나, 엄마 먼저 저기 구석 간이침대에서 좀 자다가 내랑 새벽에 교대하자. 엄마 가서 눈 좀 붙여봐라. 이러다 또 쓰러진다.”

미진은 엄마를 눕히고 영진의 침대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영진의 손가락에 실 금반지가 눈에 띄었다.

미진과 영진이 대학생일 때 용돈을 모아 둘이 똑같은 반지를 사서 나누어 낀 반지이다.

연년생이라 자주 다투면서도 둘도 없던 친구였다.

다투고 나면 영진은 늘 먼저 웃으며 화해 신청하던 멋진 동생이었다.

겨우 한 살 차이지만 미진을 언니로서 존중하며 대해주었다.

둘은 넓은 방을 선택하며 한방에서 같이 지냈고 침대에 누워 이 얘기 저 얘기하며 재잘재잘거리다 늦은 새벽 시간에야 잠들곤 했다.

그런 영진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 미진은 왜인지 다 거짓 같았다.

그냥 내일 아침이면 하품하며 일어날 것 같았다.

너무 많이 자서 허리 아프다며 수다 떨 것 같았다.

배고프다며 미역국 끓여달라고 할 것 같았다.

이건 우리 집의 현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발 깨어만 달라고 믿지도 않던 하늘의 모든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미진은 정란과 약속했던 시간이 되어 정란이 누워있는 침대로 갔다.

정란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미진이 다가가 정란에게 물었다.

“엄마. 좀 자라니까 왜 안 자고 있는데. 한숨도 안 잤나?”

“미진아... 내 인생이 너무 싫다. 왜 내한테만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지 모르겠다. 누워있는 영진이가 불쌍해 죽겠다. 쟤가 왜 이런 일을 겪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미진은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 정란이 아이처럼 퍼질러 앉아 천장을 보며 엉엉 우는 모습을 봤다.

가여운 어른이었다. 미진은 하루 종일 우는 정란이 저러다 또 쓰러질까 봐 겁이 났다.

“엄마.. 조금 더 자라. 내 조금 있다가 다시 올게.”

“아이다. 엄마 이제 영진이 보러 가야겠다. 조금 자고 있어라.”


조금이라도 누워 잠을 청하려던 미진은 왜 정란이 잠을 자지 않고 앉아서 울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미진도 누워 한참을 울었다.

엄마 정란이 들을까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한참을 울며 시간을 보냈다.

자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병원으로 다시 온 봉식이 정란의 곁으로 왔다.

봉식이 정란에게 그동안 알아본 정보를 건넸다.

“서울로 옮기려고 알아봤는데 흔들리는 차 안에서 머리가 흔들릴 텐데 그게 또 원인이 되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고 아무도 추천 안 하더라. 서울은 당분간 못 가겠다.

집에서 좀 멀지만 뇌 분야에 유명한 교수님 계시는 병원으로 내일 옮기자.

여기서는 더 할 게 없다.”

다음 날 응급차에 누워 영진은 병원을 옮겼고 미진은 응급차량 안에서 동생 영진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그 횟수만큼

그녀의 수명이 줄어들까 걱정되어 신경이 쓰였다.

봉식 주변의 도움으로 바쁜 교수님의 일정 속에 끼워 영진의 진료가 빠르고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CT, MRI를 다시 찍어 다시 진단받길 원했던 봉식은 혹시 다른 결과가 나오진 않을까 기대하였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너무 늦었다는 게 공통된 결과였다.

만약 영진이 쓰러진 그 시간에 친구들과 고깃집이 아니라 집이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그날 나가지 못하게 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그날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은행에서 단거리 선수처럼 일하지 않았다면.

실적 따위 무시하고 여느 직장인들처럼 다녔다면 달랐을까.

애초에 은행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이런저런 검사와 의사 선생님과의 미팅으로 정신없는 하루가 또 지났다. 병실의 아침은 꽤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다. 들어간 2인실 병실 옆 침대 환자는 영진이 입원한 다음 날 퇴원하여 비어 있게 되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미진은 그곳 보호자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취했다. 봉식과 정란은 집으로 가 병실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짐을 가지고 다시 병원으로 오기로 했다.

쪽잠 자던 미진에게 전화가 와 통화를 하였고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오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침대에서 내려와 영진에게 다가간 미진은 순간 얼음이 되었다.


영진이 눈을 뜨고 있었다.

“영진아! 영진아. 살았다! 영진아.

내 누군지 아나! 잠시만 선생님 불러올게.

간호사 언니! 언니! 여기 좀 봐주세요.

눈 떴어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