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부모라는 이름으로

by 송화


미진은 동생 영진에게 남자 친구 진우가 온다는 얘기를 해주었고

남자 친구가 뭔지 구분을 못 한 영진은 그저 친구라는 이야기에 좋아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영진을 마지막으로 본 진우는 과일바구니를 준비해 집으로 왔다.

정란은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우리 집 처음 들어와 보제~

맨날 밖에만 있다가 갔제~ 어서 온나.”

그가 도착하기 전, 미진은 봉식에게 안방에 들어가 계시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봉식은 거실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는 인사를 하고 소파에 앉았다.

미진은 불편할 진우가 안쓰러워 영진의 방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했다.

정란은 과일을 잔뜩 깎아 내왔고 미진은 과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둘이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했다.

영진과 예전만큼의 대화는 어려운 일이지만 얼굴이라도 편하게 보다 가라는 미진의 배려였다.

영진은 색칠 놀이를 하자며 색연필을 꺼냈고 진우는 놀란 기색 없이 영진과 놀아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가 이제 가봐야겠다며 방을 나왔고 정란은 그를 붙잡았다.


“진우야. 벌써 가려고? 밥 같이 먹을라고 밥하고 있었는데~ 한술 뜨고 가지~”

“아.. 그럼.. 먹고 가겠습니다.”


음식 솜씨가 좋고 손이 빠른 정란은 짧은 시간에

한 상 가득 차렸다.

반찬이 빽빽이 채워진 상을 보며 진우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봉식도 밥을 먹으러 다가왔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던 미진은 밥과 국물만 빠른 속도로 먹는 그를 보며 거절을 못 해 앉아 있는 진우가 또 안쓰러웠다.

밥을 다 먹은 그는 봉식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다 겨우 일어났다.

정란은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마중했다.


“진우야, 다음에 또 놀러 온내이~

영진이가 니 한 번씩 찾더라. 꼭 놀러 온나~”

거실에 앉아 봉식과 정란은 그에 대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애가 이제 보니 참 착하네.”

“말은 별로 없지만 예의 바르고 진중해 보이고 괜찮지예.”

“어머니 뭐 하신다고 했노?”

“모르겠어예. 주부는 아니라 했고..

미술관인가? 박물관인가?

뭐 그런 거 하신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납니더.”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전화해서 한 번 물어볼게예.

어머니 시간 되시는지.”


옆에서 대화를 듣던 미진은 숨이 막혔다.

반갑게 맞이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니.

소름이 끼친 미진은 그만 대화에 끼어들어 버렸다.


“엄마. 진우 어머니 만나서 뭐 하려고?

무슨 얘기하려고?”

“아니, 뭐. 너거 영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라 했지. 왜?”

“어??????? 지금 영진이 아픈데 뭘 어떻게 생각해?”


미진의 말을 들은 봉식이 불쑥 끼어들었다.


“니는 동생이 평생 이러고 늙어 죽길 바라나.

그 애 아니면 이제 영진이는 시집 못 간다.

그 애가 마지막이라고.

누가 데리고 가려고 하겠노.”

봉식은 현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픈 영진을 데리고 가 살 수 있는 지고지순한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미진은 사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봉식의 마음은 본인을 위한 처절한 이기심이었을까.

자식을 위한 부모 된 도리였을까.

집에 다녀간 진우가 집에 오지도 않고 연락이 없자 봉식은 정란을 시켜 그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어~진우야~ 나 영진이 엄마. 잘 지냈제.. 하하. 어째 요즘 바쁜갑제.. 통 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고.. 그래서 한 번 전화해 봤다. 하하..”

“아.. 네. 어머니랑 제주도에서 새로 일 시작해서.. 요즘 조금 바빴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영진이는 좀 어때요?”

“어~ 영진이 요새 많이 좋아졌다.

헬스장 다니면서 운동도 하고..

기억력 훈련도 많이 하고 있고..

집에 또 한 번 밥 먹으러 안 올래?”

“제가 요즘 새로 시작한 일이 조금 바빠서.. ”

“아~ 그렇나~ 혹시.. 어머니한테 영진이 아픈 거 말씀드렸나..?”

“저희 어머니요?”

“응~ 어머니가 영진이 은행 다니고 했던 거 다 알고 계시제?”

“네. 은행 다닌 것도 알고, 지금 아픈 것도 다 알고 계세요.”

“그래? 뭐라 하시드노?”

“아.. 걱정하셨어요. 어머니가 영진이를 많이 이뻐하셨거든요..”


그때 스피커 폰으로 듣고 있던 봉식이 정란의 통화에 끼어들어 진우에게 말했다.

“진우야. 내 영진이 아부지다. 허허.”

“안녕하세요,,”

“그래.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한 번 했으면 하는데.. 혹시 어머니 시간 되시면 우리랑 같이 밖에서 식사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전화했다. 영진이 엄마는 중요한 이야기를 자꾸 빙빙 돌려 말해서 내가 이래 직접 말한다.”

“... 아... 어머니...요...”

“왜? 아무래도 내가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는 게 낫겠나? 그러면 어머니 번호 한번 불러줄래?”

“아... 제가 오늘 저녁에 여쭤보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어~ 그래그래. 어머니한테 영진이 아부지가 꼭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전해주고. 어. 들어가래이~”

그날 저녁 진우는 정중한 어머니의 거절을 전달했고 이후로 전화도, 방문도 없었다.

영진의 친한 친구들에게 듣기로는

진우가 영진이 아픈 뒤로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가 계시는 제주도에 일부러 내려갔다고 했다.

부산에서 술만 마시며 몸도 많이 상하고

그리움과 죄책감이 함께 그를 뒤덮어

혼자서는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봉식과 정란은 누구라도 본인들과 같은 상황에 있으면 그렇게 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부모로서 당연한 거라고 했다.

그렇게나 다투고 상처 주던 서로는 옥단 이모의 말처럼 어느새 한 팀이 되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부끄러움도 함께. 이기심도 함께.

영진은 젊은 나이라 그런지 회복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깊이 대화하지 않으면 아팠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엔 예전과 달라진 점을 찾기 어려웠다.

다만 가끔 감정 조절을 못 할 때가 있고 상대방의 말을 왜곡되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가족끼리만 만나는 경우엔 가족들이 말을 조심하며 살았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진의 은행에서는 산재 처리를 계속 진행할 수 없으니 특별 부서에 출근하기를 바랐다.

그 부서는 영진처럼 사고가 나 몸이 아픈 경우나, 직원의 횡령 관리를 잘못한 지점장님,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피해자, 또는 괴롭힌 자들이 대기 발령을 받아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고객들을 만나지 않는 부서라 영진이 출근 후 만나는 직원은 겨우 4~5명이 전부였다.

영진은 은행에 다시 출근한 날부터 집에 오면 정란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엄마, 나 점심 먹고 양치하려고 내 사물함 열었더니 누가 거기에 빨간색 사인펜으로 낙서를 해놨더라.”

“엄마, 오늘은 여자 선임님이 나보고 머리도 나쁜 애가 은행에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었다.”

“아침에 출근하고 신발 갈아 신으려는데 내 실내화에 더러운 휴지가 꽂혀있었다.

누가 했는지 알 것 같아서 물어보니

아니라고 딱 잡아떼더라.”


마침, 같은 부서에 대기 발령 중인 직원 중 영진의 동기가 있어 그 동기와 연락이 닿았다.

정란은 은행 안에서의 영진이 어떤지 물었다.

정란은 아픈 영진의 말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지만 또 너무 구체적인 영진의 말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동기의 말은 영진이 부서에서 혼자 지내고 늘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직원에게 가서 화를 내고 항상 예민해 있어서 사람들이 굿모닝이라는 인사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사물함이나 실내화에 괴롭힘은 없었고 사물함의 낙서는 영진이 쓰기 전부터 있던 거였고,

휴지는 실내화 근처에 누군가 지나가다 떨어트린 거라고 했다.

의도를 가진 괴롭힘이 아니었다.


영진의 후유증은 그렇게 짙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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