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본사에 자신이 괴롭힘 당하고 있다며 고발했다.
매일 같이 이메일을 보내 인사부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한 번 들어온 고발을 묵인할 수 없어 조사를 진행하였지만, 이메일 속 사건들은 영진이 지어낸 소설과 같았다.
인사부와 정란은 의논하여 더 이상의 출근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퇴직을 진행하였다.
봉식은 퇴직하면 영진이 집에만 있으며 뇌가 더 퇴화하여 악화할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거기 그대로 출근을 시켜 남에게 피해 주는 걸 계속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봉식의 말대로 영진은 집에만 있었다.
운동은커녕 집 밖으로 나가길 극도로 거부했다.
하루 종일 책만 읽었다.
책을 읽어 똑똑해져서 다음에 어딘가에서 예전 직원들을 만나면 유창한 말솜씨로 이기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 둘 곳이 없어진 영진은 쓸데없는 물건을 계속 주문해 집안이 물건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영진과 정란은 부딪히기 시작했다.
영진은 집 입구 CCTV로 전 은행직원들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혔고
2, 3년째 같은 주장을 들은 정란은 지칠 대로 지쳤다.
정란은 집 근처 아파트를 구매해
영진을 독립시켰다.
의사 선생님이 해주신 조언으로는 혼자 살게 되면 움직이기 싫어도 움직여서 살림도 살아야 하고, 요리도 해야 하고, 청소도 스스로 해야 하며
그렇게 살다 보면 뇌를 더욱 사용할 수밖에 없어 기억력, 인지 부분의 퇴화는 늦어질 수 있으니 긍정적인 방법이 될 거라고 하셨다.
독립한 영진의 몸은 예전보다는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그녀의 망상은 계속되었고 딸의 후유증을 받아들이지 못한 정란, 봉식은 알면서도 그녀와 자주 부딪히고 다투고 화를 냈다.
영진이 봉식에게 대들고 소리칠 때마다 봉식은 왜인지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가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미진은 글 쓰는 작업을 잠시 멈추었지만 육아하며 더 큰 행복감을 느끼며 살았다.
유진은 봉식의 반대로 배구의 길을 가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지만,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직업에 만족감을 가졌다.
또 착한 심성의 남편을 만나 자식 둘 낳아 대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동안 식당 일, 영진 간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살던 정란은 지난날을 돌아보다 문득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난다면 억울할 것 같아서 식당을 접었다.
남들이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도대체 다 어디 쓰냐고 타박할 때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던 말들이 전을 굽다 기름에 작은 화상을 입어 손등을 바라보다, 문득 기름 냄새에 절여 쭈글쭈글해진 그녀의 손이 가여워졌다.
그녀는 그날 일찍 문을 닫고 다음 날 폐업을 진행하였다.
쉬는 방법을 모르는 봉식 역시 갑자기 식당을 닫으면 앞으로 뭘 먹고살 수 있냐며 불안해했다.
애들 결혼도 다 했고, 앞으로 예전처럼 돈이 크게 나갈 일은 없기에 건물에 세를 주며 나오는 돈으로 노후 대비는 충분할 것 같았다.
지금껏 일하느라 휴가도 없었던 정란은 대가족이 된 기념으로 여행을 가고 싶었다.
자연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정란의 의견을 따라 가까운 괌으로 첫 대가족 여행을 떠났다.
오랜만의 여행에 기분이 좋았던 영진도 그곳에서는 망상, 피해의식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져 여행 내내 컨디션이 좋았다.
가족들은 5일 동안 수영하고 먹고 구경하고
사진 찍고 즐기며 지냈다.
정란은 저녁마다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방으로 와 재롱부리는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영진은 사진 앨범을 만들어
미진, 유진, 정란 집에 하나씩 전달했다.
영진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앨범 보는 재미로 지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정란과 봉식에게도 노년의 시간이 다가왔다.
나이가 들고 아픈 봉식은 예전의 봉식보다 더 까칠했고 요구사항이 많았다.
자식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며 그래서인지 손자, 손녀들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며 정란을 볶아댔고 팔순 잔치를 성대하게 준비하지 않은 자식들에게 노발대발 화를 냈다.
이제껏 키워준 대가가 이런 거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남 보기 부끄러워 고개를 들고 살 수 없다고 했다.
정란은 나이가 들어도 그의 옆에서 그의 기분을 살피며 살았다.
식당 일을 그만두며 그녀는 하고 싶던 운동이나 마음껏 하며 편하게 살고 싶었지만,
이놈의 팔자는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봉식 삶의 마지막을 향해가던 어느 날
미진은 봉식에게 물어본 말이 있었다.
“아버지. 혹시 살면서 후회되는 일 있습니까? 아니면 사과하고 싶거나..”
“내가 뭘 잘못해야 사과하지! 내가 어디 그럴 사람이가. 깨끗하게 살았는데. 너거 엄마가 나를 아주 힘들게 했지, 내가 평생을 고생했다.”
미진은 그날부터 멈추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인터넷과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로 어느 곳이나 누구나 부담 없이 글을 쓸 수 있고 독자들 또한 인터넷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미진은 그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며 가슴속 깊은 언저리에 내내 자리 잡아 때때로 자신의 정신을 힘들게 한 감정들을 꺼내어 버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님의 심정을 알 것 같다고 했지만, 미진은 달랐다.
부모가 되어보니 자신의 부모님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괴리감이 미진을 숱하게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괴리감 덕분에 미진은 그녀의 글을 인정해 주는 출판사를 만나 드디어 책을 출간한 작가가 되었다.
아프다는 소리를 달고 살며 예전의 군주였던 자신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또다시 행하던 봉식은 아파 죽어도 요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를 집으로 모실 자식이 없었다.
봉식은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봉식이 떠나고 혼자 남게 된 정란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미진에게 부탁했다.
“미진아. 롯데자이언츠 경기 보려면 어디서 표를 살 수 있는데?”
“엄마. 야구 보고 싶나? 요새는 앱으로 예약해서 볼 수 있다. 우리 다 같이 가자. 내가 예약할게.”
식당 일하느라 그동안 티브이로만 경기를 본 정란은 손주들과 직접 가서 열기 가득 응원도 해보고 치킨도 먹어보고 싶었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마! 마! 쌔리라!”
봉식이 좋아하던 가수 조용필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 잠깐 생각에 잠긴 정란이었지만 곧 분위기에 취해 같이 젊어진 기분이 들었고 롯데의 홈런을 직접 보니 가슴속이 시원했다.
“미진아, 요즘 파크골프라는 게 있다던데...”
“엄마, 그거 배우고 싶나? 내일 같이 가보자.”
운동이 그리운 정란은 이제 나이가 들어 원하던 운동을 해서는 안 되는 몸이 되었다.
파크골프는 노년에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기에 정란은 배워보고 싶었고 첫날부터 쉬는 시간 없이 배울 정도로 흥미로웠다.
난생처음 동호회 모임도 가지고 파크골프 대회에도 적극적으로 나가며 지난날의 아쉬움을 그렇게나마 채워갔다.
배구와는 다르게 기구를 사용하는 운동이지만 클럽으로 공을 제대로 맞추었을 때의 타격감과 그 공이 정확하게 홀에 들어가 점수를 내는 짜릿함은 배구와 묘하게 비슷했다.
정란은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연습하여
대회도 참가해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먼저 떠난 봉식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정란은 현재의 삶에 만족했다.
진정한 정신적 자유로움을 느낀 정란은 노년에도 건강을 유지하며 여유롭게 살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영진의 상태가 날이 갈수록 나빠져 이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옴을 체감하고 있었다.
중년이 된 영진은 뇌의 퇴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인지 장애를 겪고 집을 찾지 못해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거나,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현관 비밀번호를 잊어 열쇠 수리공을 부르는 일이 잦아지다 급기야 정란을 잊어버린 시간도 점차 늘어갔다.
말할 때 단어 기억을 못 하고 어눌한 발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입을 똑바로 움직이려 노력했지만,
발음은 새어나가고 상대방이 알아듣기가 힘든 경우도 종종 생겼다.
감정 조절이 어려워 하루에도 수십 번 화를 내고 돌아서면 화를 낸 기억을 잊고
즐거운 상태가 되어 주변 가족이 힘들었다.
영진의 시간은 남들과는 다르게 매우 빠르게 흘렀고 더 이상 약으로 버티기엔 한계가 있었다.
정란이 그동안 영진을 요양원이나 시설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해 마지못해 알아본 후,
혼자 시설을 방문했던 미진은
할머니, 할아버지뿐인 그곳에 이제 겨우 50대인 영진이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의문이었고
아직 그녀에겐 여전히 어리기만 한 동생을
그곳에 혼자 두는 게 영 미안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 옆에 두며 그녀를 돌보았지만,
미진은 이제 결정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