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란과 미진은 영진 앞에 앉았다.
“영진아.. 우리 이제 이사해야겠다...”
“누구세요?”
“미진언니다.. 니 언니.”
“아~ 그런데 여기 왜 왔어?”
“영진아. 이제 여기 말고 훨씬 더 넓은 곳으로 이사 가야 하는데.. 혹시 꼭 챙기고 싶은 물건 있나?”
“우리 여행 가요? 잠시만요. 금방 가져올게요! 가지 마세요!”
영진이 챙겨 온 건 수저,
맞지도 않아 못 입은 이십 년도 더 된 원피스,
굽 있는 하이힐,
챙 넓은 모자,
책 두 권 그리고 괌 여행 앨범이었다.
“영진아. 괌 여행 좋았나..
이 앨범은 어딜 가나 들고 다니네..”
“어. 언니야. 엄청 좋았다. 또 가고 싶다.”
오랜만에 미진을 알아본 영진이었다.
“영진아. 언니 기억나나.. 영진아.. 미안하다..”
“언니야~ 미안하긴 뭐가.. 왜 우노?
엄마는 또 왜 우는데?
왜. 무슨 일 있나? 내 이제 안 아프다. 봐라. 멀쩡하잖아.”
“그래. 영진아. 니 멀쩡하네. 언니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니를..”
또 마음이 약해진 미진을 위해 정란이 나서야 했다.
“영진아. 이제 여기보다 더 넓은 곳 가서 운동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랑 게임도 하고,
색칠 놀이도 하고, 요리도 가르쳐 주는 재밌는 곳으로 이사 갈 거다..”
“..... 누구세요? 누구신데 저를 데리고 가신다고 해요? 저 내일 은행 출근해야 하는데요?”
정란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미진은 도저히 못 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영진이 태어나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산 세월은 겨우 27년이었다.
27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미진과 같은 방을 사용하며 매일 침대에 누워 조잘대며 새벽녘에 잠들고, 함께 의지하고, 함께 웃고, 울고, 싸우고, 밥 먹으며 친구처럼 지낸 사이였다.
그녀가 뇌경색을 앓은 뒤 그녀의 삶은 행복했을까.
그녀가 가끔 정상적인 인지기능이 돌아올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아무리 아픈 환자라도 본인의 삶에 대한 선택을 스스로 하고 싶지 않을까.
마지막까지 그녀의 삶에 그녀가 원하는지, 아닌지 모르는 선택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정해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미진은 두려웠다.
정란은 영진을 시설로 보냈다.
영진의 병이 심각해져 갈 때 이미 정란은 마음의 준비를 다 했었다.
지금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정란은 자신이 결정하지 않으면 두 딸 들은 영원히 영진을 시설에 보내지 못한 채 옆에 붙어서 자기 자신을 갉아먹으며 살아갈 것이다.
정란과 함께 간 그곳에서 영진은 괌 여행 앨범을 손에 꼭 쥐고 방으로 들어갔다.
낯선 공간에서 영진은 어린아이처럼 잠시 떼를 썼지만, 정란은 영진을 달래고 나왔다.
마치 첫 유치원 입학한 날의 어린 영진과 똑같이 떼를 쓰는 영진을 보며 정란은 그 시절이 떠올랐다.
영진은 태어나 유난히 다른 아이들보다 발작 같은 울음이 많았다.
봉식에게 혼이 나면 코피를 쏟기도 했고 식은땀을 흘리며 주저앉기도 했다.
그때라도 알았더라면, 그때 검사를 해봤더라면.
정란은 영진이 아픈 뒤로 매 순간이 후회였고 죄를 지은 듯 미안했다.
모든 게 자신이 부족해 일어난 일 같았다.
가장 기쁜 순간에 가장 잔인한 일이 일어나 처음에는 하늘을 원망했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켜주지 않는 것 같아 괜히 화가 났다.
왜 자신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분노도 해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정란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더 품어주지 못한 자식들에게 미안했다.
제대로 된 직업이 없던 미진에 대해 이웃이 그녀의 안부를 물어보면 주춤하며 대답을 꺼리던 시절,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동창이 아픈 둘째 소식 들었다고 했을 때 속으로 잠시나마 부끄러웠던 자신이,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엄마의 치맛바람 흔들게 해 준 막내 유진이 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엄마들의 모임에서 소외될까 봐 잠시라도 반대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살아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신경을 쓰며 살았었다.
정작 중요한 일들은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봉식이 떠나기 전, 요양원에서 호출이 와서 급히 찾았다.
코에 호스를 끼우고 있던 봉식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정란에게 해준 말이 있었다.
“그동안, 미안했다. 나이 들어보니 미안한 것 투성이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사과해야 할지 몰라 그동안 못했다. 용서해라.”
떠나기 직전 사과하는 봉식을 보며 정란은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떠나기 전 사과하여 본인의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정란은 젊은 시절 그를 원망했던 자신이 괜히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지만,
쉽게 훌훌 털어 버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정란은 남은 이들에게 선택할 시간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먹고 미진을 불렀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노인이 한평생 살아가며 나이와 함께 딱 붙어버린 마음을 바꾼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정란은 지금이라도 성숙한 사람이 되어 떠나더라도 멋진 엄마로 기억되고 싶었다.
“미진아,, 엄마가 어린 니한테 동생들 챙겨라고 쓸데없는 책임감 심어주고 아버지랑 다투면서 못 볼 꼴 다 보이고, 또 영진이 남기고 떠날 앞날이 미안하다.
엄마, 아버지는 너희들 만나서 그래도 행복했다.
너희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었어도 경상도 사람들이라 그게 좀 부족했던 것 같다..
또 어릴 때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도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서 자식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다. 엄마, 아버지 용서해라..”
“그게 뭐 다 엄마 때문이가.. 용서는 무슨, 엄마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닌데....”
미진의 가슴속 꽉 조여있던 매듭이 조금씩,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백발에 허리가 살짝 굽어버린 정란은 영진을 만나러 가는 길이 조금 힘들어졌고
미진, 유진은 한 달에 두 번씩 꼭 시간 내어 영진이 지내는 곳으로 갔다.
갈 때마다 오늘은 영진이 좋아지길 바라며 가보지만 막상 영진의 병은 날이 갈수록 악화하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인데 자매들의 마음은 그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싶었다.
정란을 잊은 영진인 줄 알았건만 정란이 시설을 찾아가지 않자, 그때부터 미진이 가면 엄마를 찾았다.
시설 선생님께서는 자매들이 오는 날을 영진이 전날부터 은근히 기다린다고 했다.
가족을 알아보진 못해도 영진은 미진에게 다가와 팔짱을 끼고 날씨도 좋은데 밖에서 이야기하자며 끌고 간다.
항상 똑같은 테이블, 의자에 앉은 영진은 괌 여행 앨범을 들고 와 똑같은 사진에 똑같은 설명을 하지만 그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마저도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시간임을 알기에 모두 마음을 다해 그녀의 설명을 집중하여 듣고 집으로 향한다.
고난, 쉼, 도전, 용기, 사랑, 관심, 고통, 낙, 후회, 그리움, 희망.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이 단어들의 찰나가 이어져 하나의 긴 이야기로 완성되어 간다.
고난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고, 쉼은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갈 숨을 주고, 도전은 멈춰있던 시간을 움직이게 하고, 용기는 두려움 너머의 세상을 보여준다.
사랑은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키며, 관심은 서로를 이해하는 다리가 되어준다.
고통은 깊이를 남기고 낙은 고통의 깊이 속에 피어난 작은 들꽃과 같다.
후회는 다음의 길을 더 조심스럽게 만들고 그리움은 지금껏 지나온 날들을 반짝이게 한다.
그리고 희망은 이 모든 단어를 품는 어머니와도 같다.
정란은 삶이 던져준 수많은 찰나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품고 자신만의 걸음으로 묵묵히 걸어 나갔다.
고요하고도 단단히 빛난
내 엄마, 정란의 삶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