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은 이들의 시간

by 송화

간단한 장례가 끝나고

오빠들과 동생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정란은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막냇동생을 업어야 했다.

일찍 젖을 떼고 천 기저귀를 두른 막내는

늘 울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도

엄마 품과 누나 품이 다른 걸 알았는지

안아주면 그치지 않던 울음이

업어주면 뚝 그치고 잠이 들곤 했다.

그 덕에 더운 여름 정란의 등은

땀띠로 덮여 있었다.


정란은 학교에서 배구선수 기대주였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다부졌고 순발력과 힘이 좋아

감독님이 직접 발탁한 아이였다.

정란도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아본 배구이고,

팀에는 정란이 의지하던 선배 언니가 있었기에

배구 연습하는 날이 정란에겐 선물 같은 하루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학교를 못 가는 날이 늘어만 갔고

배구팀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작은 시골 마을이라

쉬쉬한 집안 사정은 금방 퍼져나갔고

감독님께서도 정란을 붙잡지 못하셨다.

아쉬운 마음으로 나오는 길,

더운 여름날 초록으로 뒤덮인 학교 안

이글대는 운동장에서는

지난달까지도 같이 훈련받던

언니, 친구들의 기합 소리와

공과 손바닥의 마찰 소리가 가득 퍼지고 있었다.

혼자만 달라진 일상과

영영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는 불안감,

공을 내려칠 때의 그 짜릿함과 시원함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생각에

정란은 몰래 한참을 울었다.

티셔츠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얼룩덜룩해지고

눈 밑을 하도 닦고 비벼 까슬해질 때쯤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옥단 이모에게 잠시 맡긴

막냇동생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달리기 시작했고

이모 집에 다다를 무렵

툭하고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 지금은 이게 내 최선이다. 됐다 마. '


옥단 이모는 정란이네 집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어린 정란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식구가 많고

정란은 부엌일을 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이모는 어머니의 바로 아래 동생이시다.

유난히도 어머니와 닮아 부엌에서 일하는 이모를 볼 때 정란은 가끔 움찔 놀라곤 했다.

"정란아, 조금만 더 고생하그라.

곧 있으면 학교도 다시 갈 수 있게 될 꺼다. “


옥단 이모는 시골 마을에서 유명한 무당이었다.

"이모가 우째 압니꺼..? “


"할머니가 말씀 주시네~~ “


"그 할머니란 분은 어머니 돌아가시는거는

몰랐는갑지예?

다른 거는 잘도 알려 주시면서... “


옥단 이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유난히 습하고 무덥고

한없이 무거웠던 여름이 지나 가을이었다.

시골의 가을은 아침, 저녁으로 꽤 쌀쌀해

7남매가 다닥다닥 붙어 자도

새벽이 되면 으슬으슬 찬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정란이네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옥단 이모는 아버지께 하실 말씀이 있는지

오늘따라 집에 가지도 않고

저녁밥을 다 먹을 때까지 서성였다.

"저.. 의논드릴 일이 있어가꼬예... “


"그래, 뭔데? 무슨 일 있나? “


"건넛마을 사시는 분인데예..

겉모습은 좀 그래도...

마음은 따뜻해가 애들 잘 품어줄 사람이 있어예.

언제까지 혼자 사실 수는 없잖아예..

이제 애들도 힘든 거 잊고

다시 시작해야 안 되겠습니꺼? “


"그런 얘기 하지 마래이.

만철이 엄마 간 지 얼마 됐다고 벌써...

난 생각 없다. “


"정란이 좀 보이소.

저 어린애가 학교도 몬가고 지 몸보다 큰

솥뚜껑 열고 밥 짓고 청소하고 애만 봅니더.

정란이 생각해서라도 한번 고민이라도

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꺼?

애를 못 낳는 몸이라서 한번 쫓겨났었다 합니더.

그래서 한이 됐는가 집에 애가 일곱이라 하니

더 좋아하더랍니더.

애들한테 엄마 자리가 있어야 안됩니꺼.. “

옥단 이모의 말이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아버지도 모르시진 않았다.

정란이 학교에서 배구를 그만두고

이모네 집으로 달릴 때

우연히 정란의 달리던 모습을 보시고

몰래 눈물을 훔치시던 아버지였다.

지금 그의 현실에서 옳은 일은

옥단 이모의 말을 따르는 거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평생을 고생만 시킨 것 같아서

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어머니와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 싶었다.

하루하루가 모여 해가 바뀌고,

기억은 희미해져 갈 것만 같았다.

붙잡고 싶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녁만 되면 밭에 가는 일이었다.

오이, 깻잎, 상추, 배추, 고추, 부추를 따시고 씻어 저녁상에 올리셨다.

”키워주던 이는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려도,

너희들은 건강하게 잘~자랐네. “


정란은 한동안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왜 그 새벽에 어머니를 안고 울고만 계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나가는 어머니를 막지 못했는지,

왜 어머니가 그 지경이 되시도록

옆에서 모르셨는지.

아버지나 정란 스스로나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매일 밭에 가셔서 어머니의 보물들을 따시는 아버지 모습에 조금씩 미운 마음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버지..

옥단 이모 이야기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밖에서 들려버렸어예.

저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더.

학교 뭐 지금 가나, 내년에 가나,

아니면 뭐 집에서 공부 하나, 똑같십니더.

공부에 취미 없어예.

그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이소.

막내가 다른 사람 품에 갈런지도 모르겠고요.

아, 또 혹시나 제가 이런 얘기했다고

건넛마을 분 못 오게 하시고 그라시는건 아니지예?

제 말은 그냥,, 저는 다 괜찮으니까..

아버지 원하는 대로 하시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예.. “

정란의 말에 아버지는 훌쩍 커버린

정란이 안쓰러웠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에 충격받고

어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정란이었는데

어느새 아버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딸이었다.

”정란아, 배구 다시 하고 싶제? “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와 대화 나눌 일이

자주 없던 정란은 아버지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 알고 계신 건가? 내가 배구 좋아하던 거를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고? ‘

”아입니더,

막내하고 시간 보내는 게 재밌습니더.

애가 어찌나 죽도 잘 묵고, 잘 기어 다니고.. “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

말을 끝내지 못한 정란이었다.

그런 정란을 보며 아버지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란이 니를 이렇게 고생시켜 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나중에 우예 다시 만나겠노.

아버지 생각이 짧았는갑다.

들어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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