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점프 탁- 점프 탁-

by 송화

팅팅 부은 눈으로 학교 교실을 들어선 정란은

선생님과 친구들의 환영에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

오랜만에 듣는 수업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학창 시절이 다시 시작되니

매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수업이 끝나고 그렇게나 그리웠던 배구팀에게 안부 인사차 들렀다.

그곳에서 감독님, 선배 언니들,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먼발치에서 연습 구경을 했다.

탁- 탁- 공중에서 공을 내려칠 때의 여전한 그 소리가 정란에게는 쾌감의 소리였다.

오랜만에 들으니,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넋을 잃고 구경하는 정란에게 감독님이 다가와 말씀하셨다.

”정란아, 연습 다시 해볼래? “

”감독님, 사실은 아버지께 허락받고 왔습니더.

저 해도 됩니꺼? 다시 들어가도 됩니꺼? “

”그래. 연습해서 내년 봄에 치르는 전국대회 우리 같이 해보자.

이제 가을 끝나가고 겨울 되면 금방 봄이다.

특히 겨울에 건강관리 잘하고 봄 되면 예선전부터 시작해 보자.

자~ 연습 멈추고 다들 모여봐라. “

감독님의 제안에 정란은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팀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으나

그동안의 공백이 있으니 당연히 정란을 끼워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감독님께 소식을 들은 언니들, 친구들도 하나같이 기뻐했다.

사실 정란이 빠지며 팀은 어려운 순간이 들 때마다 정란을 생각했다.

그녀만큼 큰 키, 점프력, 경기 이해력이 높은 선수는 흔치 않았고,

상대가 아무리 강한 팀이어도 정란은 강단 있는 선수여서 주눅 들지 않고 팀을 다독이는 든든한 역할을 하였다.

”그라믄 지금 당장 연습해도 됩니꺼? 준비운동 쪼매하고 들어가도 됩니꺼? “

정란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있었다.

감독님의 허락에 정란은 얼른 운동장 안으로 들어갔다.

점프, 탁-

점프, 탁-

얼마만의 연습인지 정란은 밤새도록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바닥이 어느새 얼얼해질 정도로 연습을 한 정란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 막내 생각이 났다.

어머니랑 어색하진 않을지, 어머니의 죽이 입에 맞을지, 울지나 않을지,,,,

잠시 멍한 정란에게 감독님이 다가와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다.

”정란아,

아버지한테는 말씀드리지 말고 얘기만 들어라.

며칠 전에 아버지가 내한테 오셨다.

정란이 니가 배구 관두게 된 건

못난 아버지 탓이라고 정란이는 아무 죄가 없으니

다시 팀에 넣어달라고 부탁하시드라.

그래서 내가 만약에 팀에 다시 넣었다가

집안 사정상 또 빠지게 되면

우리 대회 준비도 해야 하는데 곤란하다고 거절했더니,

앞으로 다시는 그럴 일 없다고,

아버지가 목숨 걸고 약속 지키신다고 하시면서

통사정 사정 하시다 가셨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노.

그러니까 정란아,

열심히 연습해서 이번에 아버지 웃는 얼굴

한번 짓게 해 드리자. “

정란은 지난밤 왜 그토록 아버지가

단호하게 호통을 치신 건지 이유를 알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가 혹시나 당신 집으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정란은 영영 학교는 물론이고 좋아하는 배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자식 많은 집이라

정란이 집으로 들어오겠다는 이 찾는 일이 여간 힘든 인이 아닌데,

아버지도 그 사실을 모르시진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붙잡아 두기 위해,

어머니가 섭섭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시려고,

정란에게 소리를 치시며

어머니께 사과하라고 윽박지를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정란은

화장실 핑계를 대며 잠시 자리를 떠났다가

이내 곧 돌아와 죽어라 연습했다.

그동안 못한 연습량을 다 채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아버지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그날 오후 집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가 일하시는 논으로 들러서 멀리 있는 아버지에게 들릴 만큼 소리를 빽 질렀다.

”아버지! 저. 오늘. 배구. 다시. 시작했어예! “

정란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묵묵히 일만 하셨다.

가을이 지나

시골 마을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겨울이 찾아왔고 어머니가 집에 오신 지도 어느덧

석 달쯤 되었다.

막내는 걸음마를 시작하여 집안 여기저기 다니며

뭐든 만져보고 궁금하면 관찰하며 입으로 가지고 갔고, 남자 형제들은 추운 겨울이면

꽝꽝 얼어버리는 냇가에서 타기 위해

나무 썰매를 만들고 얼음낚시를 위해 낚싯대도 만들었다.

정란은 밤낮으로 대회만 바라보며

집에 돌아와서도 배구 연습과 체력 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오신 뒤에도 잊지 않고 밭으로 들리셨다.

겨울이라 오이, 깻잎, 상추, 배추, 고추, 부추 대신

마늘, 양파, 시금치를 비닐 씌워 키우셨다.

아버지가 밭에 가실 때마다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더욱더 하늘을 찔렀다.

”아이고마.

뭐 하러 여기까지 따라오시고 난립니꺼.

남들이 보면 팔불출이라고 저 흉봅니더. 호호호. “


원래도 워낙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라 어머니의 기분 좋은 불만에 대답이 없어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옥단 이모와 마루에 앉아 콩나물 다듬으며 나누신 이야기는 아버지에 대한 흉인 듯 자랑인 듯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요즘 막내가 걸음마 시작해가 쫓아다니기 힘들지 않으십니꺼? “

”아이고, 애가 그럴 시기니 어쩔 수 있나.

그것보다 만철이 아버지 무뚝뚝하다고 들었는데

영~ 아이드라.

대나무만큼 큰~ 남자가 무슨

여자 일하는 밭에 쫓아와서 도와주고 돌봐주나?

달리 봤데이.

사람들이 내 흉볼까 겁난다이.

남자 밭일 시킨다꼬. “

”진짭니꺼?

생전에 밭에 가는 거 본 적 없는데 무슨 일 입니꺼~

언니 힘들까 봐 간답니꺼.

아이고 남사시럽네예.

부럽습니더 언니. 하하하. “

”부러울 것 다 죽었는갑따.

뭐시 이런 걸 가지고 부럽다고 하나~“

어머니는 이모에게 눈을 흘겼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눈치 백 단 옥단 이모가 모를 리 없었다.

이모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마법사 같기도 했다.

학교에 방학이 찾아왔고 배구팀도 일주일의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감독님께서는 선수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셨다.

”봄에 전국대회 예선전 있는 거 다들 알고 있제?

우리가 지금 일주일 동안 방학이라고 해도

하루라도 운동을 쉬면 몸이 금방 눈치챈다.

다들 알제?

집에서 하루 종일 누워 지내지 말고 틈틈이 운동하고.

특히, 얼음 위에서 놀 때는 조심해라.

올해 날씨 이상하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자. 그라믄 오늘은 일찍 들어가자.

구호 외치고 마치자, 주장. “


정란은 방학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학교, 배구 연습 핑계 삼아

어머니와 부엌에서 둘만 지내는 시간이 극히 짧았는데, 이제 무슨 핑계를 대고

그 어색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을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 일찍 마치고 집에 가자는 감독님의 말씀이

원망스러운 정란은

선배 언니, 친구들에게 연습 조금만 더 맞춰보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다들 웃으며 정란을 다그쳤다.

”정란아. 너 왜 감독님보다 더하냐~“

”좀 살려주라. 집에 가서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가 고구마나 까먹을란다. “

”푹 쉬고 다음 주에 보재이~“


포기한 정란은 일단 집으로 갔다.

오빠, 남동생들도 모두 학교를 마쳤을 텐데

집이 조용한 걸 보니 아무도 집에 오지 않았고

부엌에서 그릇 소리만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

”어~ 정란이 오늘 일찍 왔네~ 배구 연습 없는 날인가 보네? “

”오늘부터 학교 방학이고 배구도 일주일 동안 휴가랍니더.

다음 주에 연습한다고 하네예.

제가 뭐 도와드릴 일 있습니꺼?

막내는 왜 안 보입니꺼? “

”막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지쳤는지

혼자 방에 들어가드만 아직까지 잔다.

안 그래도 너무 늦으면

밤에 잠 못 자서 깨우려고 하던 참이었다.

얼른 깨워봐라. “


어머니의 심부름 중에 가장 달콤하고 달달한 심부름이다.

곧장 방으로 들어간 정란은

막내 영철이의 발바닥 냄새를 맡고

만세 자세로 잠든 영철이의 배를

손으로 문질 문질 만지며 영철이를 깨웠다.

또롱또롱한 눈을 뜬 막내는

기지개를 쭉 켜고 정란의 손을 잡았다.

막내의 얼굴 앞으로 가까이 다가간 정란은

영철이의 볼을 정란의 볼로 비비며 영철이의 웃음을 자아냈다.

영철이의 웃음소리는 세상 어떤 것보다

무해한 소리였고,

계속 들어도 듣고 싶고,

영철이가 없는 공간에서도 그 웃음소리를 상상하면

같이 웃게 되는 중독성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정란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막내와 둘이 보낸 시간이 막막할 때도 있었고

우왕좌왕 바쁘고 정신없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그때의 시간이 고맙기만 하다.

영철이가 없었다면 느티나무만을 생각하며

상실감, 분노, 후회로 뒤덮여 살았을 것이다.

”아이고 우리 막내~ 일어났쪄요~

오랜만에 누나 어부바할까? “

한동안 새어머니 때문에 영철이를 업어주지 못한 정란이었다.

영철이가 소유권이 있는 물건도 아닌데 이상하게 눈치가 보였다.


어머니는 영철이를 친자식처럼 키워주셨지만

가끔은 그 마음이 넘쳐흘러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비치기도 하였다.

”이모, 어제 영철이가 옛날 일이 생각났는가

내 젖을 만지더니 먹으려고 입을 갖다 대는데

나도 주던 버릇이 남아 가지고 자연스레 물렸다 아입니꺼.

그랬드만 오물오물거리면서 빠는데

젖이 아직 남았는가 나와가꼬 한참을 웃었어예. “

”언니.. 젖이.. 나왔다고예? “


작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질문하는

옥단이모에게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영철이 아기 때는 많이 나오라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나와서 일찍 끊었드만,

와 인자 나오는지 참말로 희한하지요? “

”아..이고. 그렇네예.. 한참 먹어야 할 때는 안 나오고.. 하.. 하하. “

정란이 영철이를 등에 업고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데 방으로 오신 어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이제 애기도 아닌데 영철이 고마 내려온나.

옳지. 열심히 걸어야 밥도 잘 묵고 밤에 또 잘 자지요~“


시도 때도 없이 영철이를 업어주던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정란의 마음을 또 불편하고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냇가에 가서 오빠들 있는가 한 번 가봐라.

저녁 시간 다 됐다고 해라. “


싸늘해진 분위기에 정란은 얼른 신발을 신고 냇가로 갔다.

오빠들, 동생들이 썰매 타느라

정란이 온 줄도 모르고 쌩쌩 달리고 있었다.

”만철이 오빠야! 저녁 먹으러 오란다! “


정란의 저녁 소리에 허기진 형제들은 경쟁하듯이

미끌미끌한 얼음 위를 빠르게 걸어 나와 집으로 달렸다.


”또 시금칫국입니꺼? “


유난히 아버지를 많이 닮아 과묵한 다섯째 진철이의 반찬 투정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 소리에 놀란 첫째 만철이 오빠가 어머니를 한번 쳐다보다 진철이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그냥 무라. “

”나도 이제 시금칫국 먹기 싫습니더.

이번 주 내내 똑같잖아예.

시금칫국 아니면 시금치나물. 아니면 무나물.

달걀 먹고 싶은데. “


넷째 수철이까지 입을 삐죽거리며 반찬 투정을 부렸다.

사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음식 솜씨가 너무 좋았던 터라

남매들의 입맛이 까다로운 탓도 있지만,

새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영 아닌 탓도 있었다.

같은 시금칫국이라도 싱거울 땐 너무 싱겁고,

짜다 싶을 때는 너무 짜

국물 한 수저에 밥 두세 숟가락이 필요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국물에 흙이 그대로 묻어 나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조용히 식사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한마디 하셨다.

”느그 아버지 입이 얼마나 고급인데

아버지는 한 번도 투정 안 하시는데?

맞지요? 먹을만하지요? “

동네에서 제일 입이 무거운 아버지지만

어쩌다 한 번씩 스스로 말씀하실 때가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반찬이 정말 맛있을 때 아버지는 조용히 한마디 하셨다.

”밖에 나가서 팔아도 되겠다. “


그런 아버지이신데 지금 새어머니의 질문에 아버지는 침묵을 택하셨고 남매들은 그 모습에 키득키득 웃음이 세어나 왔다.

영철이를 무릎에 앉힌 어머니는 남매들의 웃음소리에 한마디 하셨다.

”또 내 혼자 모르는 뭔가 있나 보네.

아이고~ 서럽네.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우리 영철이 밖에 없다.

그자? 잘 묵는 영철이 보니 엄마 힘이 쑥쑥 난다. “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요리하실 때

옆에서 눈으로 배운 정란은

간혹 새어머니의 요리 순서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간장, 된장, 소금이 덜 들어간 것 같아도

꾹 참고 넘겨야만 했다.

그런 날마다 음식의 간은 당연히 맞지 않았고

형제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막내 영철이는 죽 이후

새어머니 음식으로 시작했기에

비교할 만한 음식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영철이는

어머니 음식을 인정해 주는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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