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새해가 되었지만, 남매들의 하루에는 떡국 말고는 특별히 다를 게 없는 하루였다.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정란은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사실로만 기뻤다.
방학이라 남매들이 모두 집에 있는 시간에는 시끌벅적했고 어머니의 짜증과 한숨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새해가 빠르게 지나고 며칠이 더 흘렀다.
정란의 배구팀 휴가는 오늘까지고, 내일부터는 다시 학교에 나가 팀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싶은 찰나 첫째 만철이 오빠가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내 친구 인호가 옆 동네 호수에서 썰매 대결 하자던데 같이 갈 사람 있나?
거기 엄~청 넓어서 우리 동네 냇가 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더라.
걔도 동생들 데리고 나온다는데 대결하러 갈래? “
둘째 원철이 오빠는 감기에 걸려 며칠째 열이 나서 가지 못하고,
수철이, 진철이, 경철이 이렇게 넷이 가기로 하였다.
이번 겨울 썰매를 한 번도 타지 않았던 정란은
엄청 넓은 호수가 궁금하기도 하고 집에 있으면 분명
원철이 오빠 간호만 해야 할 것 같아서 만철이 오빠를 따라나서고 싶었다.
”어머니, 저도 썰매 타러 다녀와도 됩니꺼? “
”어~ 그럴래? 그라면 막내 좀 데리고 가라.
집에 있으면 원철이한테 계속 붙어 있다가 감기 옮을 것 같다.
무슨 감기를 어디서 옮아 왔는가 아주 지독하데이, 이번 감기.
쪼매 놀다가 해 지기 전까지는 돌아 온나. “
아침을 든든히 먹고 만철이 오빠는 비장한 각오로
썰매와 양쪽 손잡이를 챙겼다.
수철이, 진철이도 썰매 하나와 손잡이를 챙겨 들었다.
정란은 어머니가 싸주신 주먹밥, 물을 챙겨
막내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스스로 걷는 즐거움을 알아버린 막내는
등에 업히기보다 혼자 걷다가 힘들거나 일행과 많이 떨어지면
정란이 품에 안고 달리듯이 걸었다가
또 일행과 가까워지면 다시 내려 막내 스스로 걸었다.
그렇게 호수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만철이 오빠는 배구선수인 정란이 보다
유난히 승부욕이 있어 겨울이 시작될 무렵 손수 썰매를 만들며 오늘만을 기다렸다.
딱지 대결에서 만철 오빠가 한번 진 뒤로 둘은 뭐든지 대결했다.
인호 오빠는 정란이네 집에 자주 놀러 와서 식구 모두와도 안면이 있었다.
”정란아, 집에 지나간 달력 모아 놓은 것 있제?
그거 좀 들고 와 봐라.
오늘 학교에서 인호한테 완~전히 져버렸다.
종이가 비실비실하니 딱지가 잘 될 리가 있나! “
”오빠야, 그거 어머니한테 들키면 내 큰일 난다. “
”괘안타. 들키면 내가 솔직하게 말씀드릴게.
일단 가져와 봐. “
그렇게 튼튼한 종이로 튼튼한 딱지를 접어
다음 날 학교를 간 만철이 오빠는
기어코 이기고 돌아와 접었던 딱지를 펴서
고스란히 어머니가 모아두신 달력 사이에 끼워 넣었다.
학교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인호 오빠와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사소한 놀이에도 승부를 걸던 둘은 마침내 꽝꽝 언 냇가에서 시합을 한 번 했었다.
”썰매 그거 제대로 만든 것 맞나? 상태가 영~이상한데? “
인호 오빠가 만철이 오빠의 신경을 또 건드렸다.
”시끄럽다. 경기해 보고 말해라. 말이 많네. “
”내 이번에 아버지가 진~짜 좋은 나무로 잘라주셔가꼬 웬만해서는 넘어질 일도 없다.
함 봐라. “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넘어진 인호 오빠는
좁은 냇가 탓을 하며 승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만철이 니 자리가 평평하고
내 자리는 울퉁불퉁해가꼬 이건 공평하지 않으니까, 다음에 다른 데서 다시 하자. “
”좋다. 그닥 울퉁불퉁해 보이지도 않는데 니가 정 부탁하면 들어주야지. “
”옆 동네 호수로 가자. 성진이가 한번 가봤다는데 엄청 넓어가꼬 시합하기 최고라더라. “
”알았다. 대신 거기서는 이기든 지든 딱 인정하는 거다. 알았제? “
”알았다. 썰매 날이나 잘 갈아 온나. “
다음 날, 호수에 도착한 만철이 오빠는 반칙이라며 씩씩거렸다.
먼저 도착해 연습 중인 인호 오빠와 동생 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호 니. 이라기 있나? “
”뭐. 안된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
”니 언제 왔는데? 언제부터 했는데?
우리 점심먹고 만나기로 했잖아. “
”그러는 만철이 니는? 지금 점심시간도 아닌데 니는 왜 일찍 왔는데? 니는 되고 나는 안되나? 우리 좀 전에 왔다. 아직 한 바퀴도 못 탔다. 성질 그만 부리고 빨리 연습해라. 여기 얼음 진짜 딴딴하다. 우리 냇가 하고는 비교 안 된다.
최고다 여기. “
만철이 오빠는 동생들을 데리고 썰매 연습을 하러 가고 막내 영철이와 남은 정란은 호수 바로 옆 작은 놀이터에서 그네에 영철이를 앉혔다.
태어나 그네를 처음 타본 영철이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가는 그네를 처음엔 무서워 내렸다가 다시 앉아보더니 이내 까르르 웃으며 신이 났다.
한창 말 배우는 영철이의 입에서 오늘 처음으로 어무, 아부 외의 다른 말이 나왔다.
”누, 또. “
”누? 누나? 지금 누나라고 말한 거가, 영철아? “
”또. “
”누나 해봐. 영철아 누나. “
”누“
”누. 나. “
”누. 나. 또. “
”그네 또 밀어라고? 알았다. 누나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밀어줄게. 우리 영철이 오늘 처음으로 누나라고 불렀는데 누나가 이거 하나 못 하겠나. 아이고 우리 영철이. 진짜 똑똑하데이. 커서 뭐가 될라고 이래 똑똑하게 태어났노~ 누나는 영철이가 세상에서 제일 최고다. “
영철이는 그네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고 정란은 그네를 계속 밀어주며 영철이의 첫 누나 소리를 곱씹었다.
”준비, 시~작! “
인호 오빠 동생의 출발 신호에 만철 오빠,
인호 오빠는 손잡이 맨 아래의 날이 부러져라 탁탁 바닥을 치며 달렸다.
출발선에 서서 응원하던 동생들은 오빠들이 반환점을 돌아 출발선으로 오면 자리를 바꾸어 릴레이 경기를 할 준비 중이었다.
만철이 오빠가 먼저 반환점을 돌았고 수철이가 침을 꼴딱 삼키며 빠르게 옮겨 탈 준비 중이었다. 만철이 오빠가 도착하자 수철이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썰매에 그대로 착석했고 타자마자 손잡이를 탁탁 치며 달렸다.
그렇게 1번 주자인 만철 오빠 덕분에 진철이, 경철이까지 먼저 들어올 수 있게 되었고 경기는 만철 오빠팀의 승리였다.
”아~ 오늘 게임 와 이리 시시한데~ 냇가 탓 하드만 냇가가 문제가 아니었네~“
”그래. 내 오늘은 진짜 졌다. 만철이 니 썰매가 보통 썰매가 아닌갑다. 그거 니가 만들었나? “
”어. 나는 아버지한테 이런 거 부탁 안 한다. “
”썰매 날을 어떻게 갈았길래 그렇게 빠르노? 아닌가? 손잡이 날 덕분인가? “
”다음에 내가 하나 만들어줄게. 인제 벌칙 해야지. 너거 다 우리 애들 썰매 뒤에 밀어서 한 바퀴 태워줘야지. “
”알았다. 까먹지도 않고 잘도 기억하네. 배고프다. 밥 먹고 하자. “
만철이 오빠와 동생들은 호수 밖으로 나와 정란과 영철이가 있는 놀이터로 왔다.
주먹밥을 꺼내 대충 둘러앉아 한입 먹으며 만철이 오빠가 정란에게 이야기하였다.
”여기까지 와가지고 썰매도 못 타고 영철이만 봐서 우짜는데. “
”아이다. 오빠야. 아까 영철이가 내한테
뭐라 했는지 아나~ 누나라고 불렀다.
정확하게 누. 나라고 불렀다.
썰매가 중요한 게 아이다 지금. “
”와~ 진짜가! 좋겠다! 누나 단어가 발음하기 쉬워서 그라나? 기념으로 둘이 썰매 탈래?
인호 애들이 벌칙으로 너거 썰매 태워주기로 했거든.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걔들이 밀어서 한 바퀴 태워주기로 했다.
영철이 그네 좋아하는 거 보니 썰매도 좋아하겠는데? “
”얼음 괜찮더나? 감독님이 조심하라 그래가꼬 탈까 말까 고민 중 이긴 한데... “
”걱정 마라. 진~짜 꽝꽝 얼어가꼬 아무리 때려도 땅땅해가 끄떡없다.
중간 부분에서만 타면 안전할 거다.
혹시 모르니까 가장자리는 가지 말고. “
”그라믄 살짝 타볼까?
영철이 내 무릎에 앉히면 될 것 같은데.”
“정란이하고 영철이 둘이 타라. 내 자리 양보할게.”
“알았다. 오빠야.
영철아~~ 니 오늘 처음 타보는 거 많네~
오늘 재밌는 거 많이 타보고 가자!
누나 내일부터는 대회 훈련 있어가
니하고 이래 시간 많이 못 보낸다.”
정란은 정란 무릎에 앉아 오물오물 주먹밥을 씹고 있는 영철이 볼에 입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밥을 빨리 먹은 인호 오빠는 놀이터로 다가와
빨리 타고 집에 가자며 재촉했고
먹은 자리를 대충 정리한 정란은 영철이를 데리고 얼음 호수로 들어갔다.
긴가민가 불안했던 마음은 꽝꽝 언 얼음을 밟으며 사라졌고 안심이 된 정란은 만철 오빠의 튼튼한 썰매에 앉아 영철이를 무릎에 태웠다.
만철이 오빠는 정란이 뒤를 미는 인호 오빠에게 당부했다.
“너무 멀리 가지 말고, 가장자리는 가지 마래이. 거긴 얼음 확인 안 했다.
그라고 애기 있으니까 너무 빨리 달리지 말고.
정란아,
불편하면 인호한테 나가자고 바로 얘기해라. 알았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