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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지 Jul 22. 2024

번아웃은 아닌데, 일하기는 싫어

일하기 싫어병 환자

#. 번아웃이 될 자격


 요즘은 너도 나도 번아웃 증상을 호소한다. 한국의 노동환경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출근하기 전에 차라리 차에 치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가 되면 번아웃이라는데...

 나는 감히 나 자신을 번아웃이라 칭하지 못하겠다. 근 몇 년 동안 당당히 번(burn)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버닝 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웃이 되겠는가? 

 솔직히 나는 직장인들에 비하면 ‘꿀 빠는’ 인생이다. 출퇴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며,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잠옷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만 켜면 출근완료다. 하루에 몇 시간을 얼마나 밀도 있게 일하든, 마감만 지키면 아무 문제없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0다. 물론 직업 나름대로의 스트레스 요소가 있긴 하나,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나는 그다지 높은 강도의 업무에 시달리지 않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도 작년까지의 나는 일하기 싫어 ‘죽겠다’는 심정이었다.


#. 꿈꿨던 일이 직업이 됐지만


 “너는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일 하잖아. 꿈을 이뤘잖아.”

 반박불가다. 누가 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고, 내 선택으로 시작한 일이며, 누군가에게 나는 꿈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걸 테다. 그래서 나에게는 감히 ‘일하기 싫어할’ 자격조차 없었다.

 아침에 요가에 다녀온 뒤, 최대한 뭉그적 거리다가 나를 강제로 끌어 앉히든 책상 앞에 앉았지만, 그와 동시에 기분은 울적해졌다. 일하는 내내 한숨을 쉬고 남은 작업분량을 지나치게 자주 확인했으며, 집중을 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마감이 급하지 않다면 일은 딱 스트레스받기 직전까지만 한 뒤에 책상 앞에서 물러나곤 했다. 내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너무 몰입해 작업을 끝내기 싫은 나머지 밤을 새우거나, 다음날 눈 뜨자마자 작업을 이어간 적도 있었다. 아주 예전에... 심지어 한때 일 때문에 나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천장에 목을 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내 삶이 끝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고, 내가 죽은 뒤 남을 가족들을 상상하니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일을 관두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이것 밖에는 없었다. 이 일이 좋으면서도 싫은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나는 일을 하는 동안 행복하지가 않았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일을 하는데 행복한 게 말이 되냐고.



#. 일과 행복의 상관관계


 얼마 전 업계에서 탑에 속하는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다는 건 없어요. 제가 쓰고 싶은 장르를 쓰고 있지도 않은데, 그걸로 이미 성공을 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남들의 기대와는 다른 걸 쓸 수 없잖아요. 글쎄요, 사람들 반응 때문에 행복한 건, 한 3초?”

 그 자리에 가보지 못한 사람 입장에선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나는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업계에서 성공한 사람들 중에 행복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얘기를 종종 들어왔다. 성공은 그들에게 족쇄였고 한 번이라도 실패할까 늘 불안해했고 거기서 오는 히스테리를 주변사람들에게 풀었기 때문에 관계조차 좋지 못하다고 했다.

 “가족들이 있으니까, 거기서 오는 행복은 있죠.”


 내 생각에도 일은 행복보다는, 내게 행복을 주는 것들(취미나 여가활동)을 하기 위한 수단(돈)에 가까웠고, 일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정신적이고 고귀한 행복보다는 육체적이고 천박한 쾌락에 가까웠다. 일을 끝낸 데서 오는 해방감이나 성과를 이뤄낸 순간의 도파민,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데서 오는 우월감 같은 것들. 하지만 선배님의 말씀처럼 성과의 순간은 너무 짧고, 또 우월감은 나보다 나은 누군가만 나타나도 금세 사라질 것에 불과하다. 성공의 최대치를 100이라고 쳐보자. 80을 냈다고 해도, 거기에 계속 만족할 수 있을까? 90, 100을 내고 싶을 거고, 100을 낸 다음엔 이 이상이 없기 때문에 허망함에 시달릴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반드시 (선배님에게 가족처럼) 일 외부에서만 가능할까?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일에 할애해야 하지 않는가.

 <도둑맞은 집중력>에서는 ‘몰입의 순간이 행복을 느끼게 한다’고도 했다. 우리는 결과에서 행복이 온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행복을 주는 건 과정이라는 거다. 결과의 기쁨은 한순간이지만, 과정은 훨씬 기니까. 또 결과는 불투명하고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으니까. 나는 과정에서 행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일에 전혀 몰입하지 못했다. 나는 차라리 이 일로 돈도 벌지 못하고 벌게 될 지도 불투명 했던 그때에 행복했다. 그때는 적어도 몰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에 집중하지 못했던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4년 내내 성과가 지지부진해서인지,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이 아닌데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서인지, 종소세와 건보료, 연금을 제외하면 턱없이 적은 돈을 받고 일해서 인지. 아마 셋 전부 다였던 것 같다.


#. 나는 하루 얼마어치의 일을 하는가?
  

 나의 오피스(우리 집 거실) 탕비실(부엌)에는 10만 원 대의 캡슐커피머신이 있었다. 나는 무려 3대의 커피머신을 거쳤는데. 디자인이 예쁘고 전용캡슐이 제일 맛있다고 해서 알리를 샀다가, 다른 캡슐도 써보고 싶어서 (알리는 팔고) 네스프레소 오리지널과 버츄오 둘 중 고민하다 결국 둘 다 산 뒤에, 버츄오는 처분. 현재는 오리지널만 남아있다. 이 아이가 살아남은 이유는 딱 하나다. 캡슐이 싸서. 버츄오와 알리는 상대적으로 캡슐에 더 많은 비용이 들었고, 오리지널은 개당 350원짜리 캡슐이 있었다. 투샷으로 내리면 700원이라 저가커피 매장 테이크아웃 커피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다.  

 왜 이렇게까지 커피값을 낮추려고 용을 쓰냐고? 커피는 일하는데 필요한 카페인 섭취를 위한 거다. 그렇다면 마시는 커피값 그 이상의 업무를 해야 한다는 게 나의 계산이었다. 하루에 커피 3~5잔 정도를 마시니, 2100~3500원의 비용을 지출하는데. 만약 카페에 가 비싼 커피값을 지불했는데, 갑자기 하기 싫어져 집에 간 날이나. 그날 마신 커피잔 수에 비해 업무량이나 퀄리티가 보잘것없을 때 나는 우울했다. 나의 끝없는 가성비 커피행은 우울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던 거다.


 심지어 나는 내가 받은 계약금을 월급으로 계산해, 휴일을 제외한 20일로 나누어 하루 일당을 계산해보기까지 했다. (내 일은 지적재산권에 대한 가치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 계산법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직 그 가치를 따질 정도로 대단한 결과물을 낸 적 없으니까ㅋ) 적어도 하루에 N만원 어치 이상의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나는 급기야 작업의 결과와 양에 값어치를 매기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그 값어치를 충분히 했는가 의구심이 들 때면 죄책감은 더욱 커져갔다. 또 그 죄책감은 또 나를 갉아먹으며 더 일을 열심히 할 의지가 꺾이게 만들었고 그러면 죄책감이 더 커지고 더 더 더... 놀거나 쉴 때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할 때에도, 늘 내 몫을 하지 못했다는 ‘죄명’이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일 앞에서 나는 늘... 죄인이었다. 그것도 대역죄인.

능지처참이요~

#. 왜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가끔 ‘나 때는 열정페이에도 아무 불만 없이, 내 몸 갈아가며 일했는데 요즘 애들은~’하며 예전에 비해서 여유로워진 노동환경을 꼰대들을 마주할 때면, 문득 내 안에 이런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저기요. 그때가 비정상이었던 거고, 지금이 정상이거든요?  

 한 번도 번(burn)된 적 없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닌 거, 아닐까? 일하기 싫은 건 정상이다. 일하는 게 좋다는 건, 헬스장을 1년 권을 끊어놓고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이나, 공부하는 게 좋다는 학창 시절 모범생과 같은 케이스다. 이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나는 절대 아닌 것. 나는 어쩌면 당연한 감정을 두고 스스로 죄책감을 부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하기 싫은 당연한 마음과 성과가 주는 쾌감, 그 사이에서 갈등하며 뭉그적 대는 사람들, 그게 우리지 않은가.


 최근에 나는 몇몇 회사로부터 새로운 계약 제안을 받았지만, 기존 회사는 반년만 더 해보자고 했다. 물론 아예 제로베이스에서 새 작업을 하는 것보다는, 4년 해온 일을 반년 더 하는 게 어쩌면 가능성은 더 높을 지도 몰랐다. 다른 곳과의 계약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하자, 팀장은 굳이(?) 이사가 나한테 실망했다고 뒷담화 한 얘기를 전했다. 그런가? 내가 그들을 실망시킨 건가?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되는 건가? 내가 나쁜 건가? 거기에 내가 한 작업이 부족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자책감까지 마구 뒤엉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의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친 그곳에서 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지도,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이 그 누구의 선택을 받지 못할 지도, 더 높은 가능성을 버리고 더 낮은 가능성을 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결국 도망을 택했다.


#. 번아웃도 아니고 일도 하고 싶어요

 

 내 마음이 도망을 원하기도 했지만, 여기저기 상담해 본 결과, 이전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라고 조언한 업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게다가 반년이나 더 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난 진짜 어디서 뛰어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회사에서의 결과물이 안 좋아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단 그건 3년 뒤의 일이지, 반년 뒤의 일은 아니다.


 요즘의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공간으로 출근한다. 무려 의무도 아닌데, 자의로. 아직 기획서를 준비하는 단계지만, 나는 도망쳐온 이곳에서 또다시 일하는 행복을 느낀다. 과정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것 투성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 제 몫을 해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만족감은 훌륭한 것이다. 다만 번아웃 될 정도로 과하지 않은 선에서. 이번에 첫 마감을 했다. 어떤 피드백받을까 생각하면 우울해지다가도, 이번에는 거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당당한 감정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게 되더라도 덜 우울하게 만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 내가 한 노동에 일일이 값어치를 매기는 미친 짓도 관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찐광기, 조금은 정신병적 행동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의욕이 생기지 않을 충분한 이유들이 있었고, 나를 우울하게 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달라진 것일까. 그것 때문만은 아닐지도? 무려 20퍼센트 넘게 오른 계약금 덕분에 금융치료를 당해서일지도? 그 계약금으로 구매한 물건들이 속속들이 도착 중이고 집에 가면 나를 반길 거라서 일지도? 일이 주는 행복은 과정에도 있으며, 또 (일 외부의) 행복을 위한 수단임에도 있는 것 같다. 일이 돈을 벌어다주고, 또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또 일 안에서 행복하기도 한 삶을 위해! 우리 모두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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