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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지 May 01. 2024

번외 : 심리상담소 밖의 심리상담

그냥 재미로 푸는 썰 (feat. 신점)


 상담센터에 다니며, 나는 분명 나아지고 있었으나, 일정하게 상승곡선을 타지만은 않았다. 작년 중반부터 될 거다, 될 거다 하던 일이 또 미뤄지자 나는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매일을 눈물로 보냈으며, 술 없이는 버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매일 상담에 갈 수도, 선생님을 붙잡고 24시간 나를 케어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결국... 신점이라는 것을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응?)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 류의 인간에 속했다. 뼛속까지 유물론자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나로선, 믿는 사람들을 속으로 내심 비웃은 적도 많았다. 틀리는 것도 많다면서? 맞춘 것도 그냥 어쩌다 때려 맞춘 거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내가 여러 선택지 중에 신점을 택한 이유는, 사주는 공부하면 나오는 거라고 하니 신점으로 맞추면 더 신기할 거 같다는 무신론자치고는 다소 유신론자스러운 이유였다.


 나는 ‘나님'이 신점을 보러 간다는 사실이 쪽팔린 나머지, 이곳을 소개해준 사람 이외에는 비밀로 한 채 찾아갔다. 솔직히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기분 좋은 얘기를 들으면 좋은 거고, 나쁜 얘기를 들으면 그냥 흘려들어야지 생각했다.

 내가 들어서 마자 무당이 말했다. 아휴, 차갑네. 성겨도 까탈스럽고. (맞음) 하지만 의심이 많은 나는 ‘생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거 아님?’ 코웃음을 쳤다. 많이 힘들었네. 안 힘들면 여길 오겠나? 또 이 역시 안색만 봐도 알 수 있다. 일 때문에 왔다고 하니 직업이 뭐 냔다. ‘허, 무당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안 보임?’ 역시 미신 같은 건 믿을 만한 게 못된다니까 체.


 그 뒤로 무당이 하는 말들에 나는 더욱 이곳에 온 게 후회가 됐다. 올해도 역시 힘들 거라는 거다. (저기요. 저 3년 동안 진짜 X같았 거던요?) 0월에(몇 달 뒤)에 되긴 되는데, 그 과정에서 별의별 일이 다 생겨 극도의 스트레스와 함께 병까지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도 스트레스받아 뒤지겄는데 여기서 더요?) 아아아아아악! 조상신 같은 건 없다. 무당은  사기다. 미신 같은 건 애초에 믿어서도 안 되는 거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나쁜 얘기는 흘려듣겠다는 결심은 10분 만에 무너졌다. 나쁜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 나는 굳이 이 나쁜 기분을 시간과 돈까지 들여가며 사러 온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되긴 된다’는 결과조차 틀릴 확률이 높잖아? 나쁜 기분에 불안감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그냥 그야말로 기분만 잡쳤다.


난 진짜 삼재 맞다

 그런데 그때 무당이 물었다. “결혼은, 했어?”
 참내, 그것도 안 보인단 말인가? 속으로 꿍얼거리며 “아뇨, 아직이요(라고 할 생각도 없으면서 대답했다)”

어차피 구남친이 된 그지만 내심 궁금했다. 심리적으로 약해지자 이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감정이 엄습했다.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을 놓친 거면 어떡하지? 차라리 어차피 궁합이 최악이라는 말로 위로받고 싶었나 보다. 아니, 사실 그와 운명이며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을 얻고 싶었나? 나도 모르겠다. (그냥 시간이 남아서 그런 거라고 치자...) 물어봐놓고도 의심했다. 그의 성격, 성향, 나와 안 맞는 점 등이 일치하긴 했으나 남녀관계야 뻔하지 않은가. 그러다 그녀가 망설이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음... 얘가 남잔데 좀 여자 같은, 중성적인 스타일이네. (어.. 어떻게 알았지?) 그래서 여자도 남자 같은 스타일은 좀 좋아해. (그건... 나?) 그런데 얘가 남자고 되게 고지식한 스타일이라 여자를 만나는 거지, 실은 남자를 만나고 싶은 거야. 올해 0월에 그쪽(?)으로 갈 거 같아.”

....뭐라고요??

 그녀는 구남친의 생년월일은 받아 보자마자 ‘어떡하지? 게인데?’ 이걸 말해말아 망설이다 꺼낸 얘기라고 덧붙였다. 머릿속에 몇몇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여자만 만났지만, 남자를 만나는 게 맞는지 고민한 적이 있다는 둥, 나 이러다 게이선언(?)을 할 수도 있다는 둥, 그저 농담이라고 여겼던 말들. 심지어 나와 헤어질 때마저 ‘아.. 나 진짜 게이가 되어야 하나’는 대사까지 했었다.

 그 모든 게... 복선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 그녀는 위로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이어갔다.

“남자들이 착각하는 게 여자랑은 서로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남자랑 만나는 게 더 쉬울 거 같지만 남자들이 더 무섭거든. 어쩌다 보니 여기가 게이 손님들이 많아져서 내가 잘 아는데...(어쩌구저쩌구 암튼 게이들 연애사가 더 험난하다는 요지의 말들)”

 그러고 보니 이곳을 용하다며 추천해 준 사람도 게이다. 내 전남친은 게이일 가능성이 있고, 여길 추천해 준 사람도 게이고 여기는 게이 손님이 많고 무당은 계속 게이 얘기를 하는 중이고...  게(이)슈탈트 붕괴에라도 빠진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나는 내 돈 5만 원과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지불하고, ‘내일 당장 나와도 모자를 결과를 또 몇 달 기다려야 함 ’+‘그 과정에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림’+‘구남친이 사실은 남자를 좋아함’ 그러니까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 같아서 만났다 그 말임러ㅣ만얼ㅇㅁ니러낭ㄹㄴ망랄... 암튼 돈 받고도 안 들을 얘기들을 들으러 온 사람이 됐다.


 나는 몇 년 전 봤던 ‘걸스’라는 미국 드라마가 불현듯 떠올랐다. 전남친(혹은 남편)이 게이였다‘는 여성이 주인공이 창작물의 흔한 클리셰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던 그가 그런 적이 없었다는 진실을 깨닫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걸스의 주인공 한나(리나 던햄)는 HPV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당 병은 잠복기 때문에 옮긴 사람을 특정하기가 어려운데 한나에게는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섹스 상대가  현재의 섹스파트너(아담 드라이버)와 구남친, 두명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나는 섹스파트너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가 아니길 바랐는데, 그는 검사결과가 음성이라고 (거짓말)한다. 한나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으며 바로 의기양양하게 전남친을 찾아가 따진다. 그런데 전남친은 검사를 한 적도 없으면서, 한사코 자신일 가능성은 없단다. 왜냐고 물으니 자신이 섹스한 여자는 한나 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한나는 말도 안 된다며 화를 내자 구남친은 털어놓는다. 나 사실 게이거든. 한나를 만나기 전까지 성 정체성에 확신하지 못해 누구 하고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나는 충격 받은 얼굴로 되묻는다.

 “그럼 나는 왜 만난 거야? 혹시... 내가 널 게이로 ‘만든’ 거니????” 그러자 전남친은 한나를 위로하려는 듯 말한다. “그런 건 아냐! 한나 너한테는 다른 여자에게선 느껴지지 않는 강한 남성성이 느껴졌어” 그 당시 몇 년 간 본 장면 중에 가장 웃겼다. 깔깔대며 한참을 웃었는데, 웃..었...었.....는데....

 (여자가 남성적 특징을 가졌다는 걸 유머로 삼는 게 옳지 못하다는 건 안다. 방영한 지 10년도 넘은 소위 옛날 드라마고 현재의 내가 스스로가 여성스럽지 못함을 불쾌해하며 희화화하는 것이 PC(Political Correctness)한지 아닌지는 그때의 나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음을 말해둔다)


구라 친 놈이랑 해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으로 무당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사고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아니 어쨌든 뭐라도 ‘맞췄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걔 같은 남자가 남성일반적이진 않지 않은가? 정말 신이 내리지 않은 이상, 그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인간의 합리화 능력이란 놀라운 것이니. 내가 놀라야 할 건 어차피 헤어진 구남친이 게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보살님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사실을 맞췄다는 사실이 됐다. 어느덧 (내 마음속) 무당이라는 호칭은 보살님으로 바뀌어갔으며, 어쨌든 보살님이 해주신 ‘될 거’라는 예언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이유는 명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이별과 후회의 감정에 잠식되어 걸핏하면 울곤 했던 나는, 그날 이후로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의 상태는 귀신처럼 괜찮아졌다. 상담 선생님에게도, 지인에게도, 동생에게도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와하핳 웃어버렸다.

 일에 대한 예언이 맞는지는 몇 달 뒤에야 알 수 있겠지만, 확실한 건 현재의 내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는 거다. 미신의 효용은 미래에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게 되는 것에 있지 않다. 현재의 내 심신의 안정에 있지. 어차피 틀렸다는 실망감을 느끼는 건 현재의 내가 아냐, 미래의 나라구!


 내가 미신을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만약 신점 결과가 현실이 된다면 보살님께 충성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미신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됐다. 누구나 다 불안하고 그걸 해소하려는 건 당연한 인간의 욕구니까. 유명 연예인도 정치인도 사업가도, 성공한 사람들이 잃을게 많고 실패가 두려워 미신을 더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는데, 걔네도 그러는데 나라고 뭐 별수 있겠나?

 신점, 그것은 논리도 이론도 실체도 없지만 나의 또 다른 심리상담이었다. 치솟은 물가상승률에도 변함없이 1시간에 5만 원인 가격(방송을 타 유명세가 생긴 곳은 수십만 원을 호가하기도 하지만)... 얼굴 모르는 조상님이 나를 돌봐주신다는 데서 오는 따스함... 오로지 나를 위한 1대 1 맞춤 서비스.... 나는 신점으로 인해 올해 최고의 가성비 심리상담을 제공받았고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거 같다.


ps. o월 즈음에 훅 그에게 전화해서 물어볼까.

‘너 혹시 남자 만나냐?’

무당이니 신점이니 전조는 생략하고 내가 지나가다 무언가를 목격이라도 한 것처럼 대뜸 물어본다면... 사실대로 말하지 않더라도,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 속 당황지수로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그게 궁금한 이유는, 그가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지가 궁금해서도, 나를 사랑하긴 했나 알고 싶어서도 아니다.

00 보살님이 얼마나 용한 건지 확인하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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