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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지 Apr 25. 2024

MBTI 말고 기질검사

혈액형, 사주, mbti... 그다음은?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


 언뜻 보기엔 인터넷 소설이나 드라마 주인공이 할 법한 비현실적 대사 같지만,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마포구 주민 3x세 신모양인 나도 입버릇처럼 읊조리는 말이다.


 혈액형, 사주, MBTI 등 시대별로 자기 분석에 대한 유행 있는 걸 보면 나 말고도 모두가 그런가 보다. 그게 아니면 내가 A형이라 소심하고, 사주에 수가 많아서 우울한지, T라서 공감능력이 없는지 굳이 테스트까지 해가며 알아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B형이고, 사주에 금이 많으며, INFP라는 것까지 알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왜 힘든지에 대해서도 모를 수밖에. 그건 상담을 진행하며 내 지난 인생사와 내면에 대해 모조리 털어놓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상담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질검사(TCI)라는 것을 했다. 기질검사의 척도는 가장 크게 ‘기질’과 ‘성격’ 두 가지로 나뉜다. 또 기질은 자극추구,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 인내력으로 나뉘고 성격은 자율성, 연대감, 자기 초월, 자율성+연대감으로 나뉜다. 기질은 말 그대로 타고난 것이라 바꾸기가 쉽지 않고, 성격은 그에 비해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각 척도별로 하위척도가 더 세밀하게 있다. 기질검사는 상담자가 내담자에 대해, 내담자 또한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 각 항목별로 수치화되어 있는 결과지는 마치 나 자신에 대한 인바디 검사 결과를 보는 것 같았다.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나라는 사람의 분석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역시나 우울감은 평균 이상, 민감성은 높았고, 목표지향성은 높은데 성취감은 바닥. 무엇보다 가장 심했던 것 수치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낮은 기력이었다. 보통은 에너지를 깎아먹는 활동한 뒤,  취미나 휴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패턴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충전이 잘 되지 않았다. 아무리 충전을 해도 완충이 안 되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금방 방전되어 버리는 오래된 휴대폰 같았다. 나는 하루 이만 보는 거뜬할 정도로 튼튼한 육체를 가졌으니 체력의 문제는 아니다.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것들로 채워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그다지 하고 싶은 게 없었다. 10대, 20대는 해본 것보다 못해본 게 훨씬 많았다. 성인이 되면, 대학에 가면, 졸업한 뒤에 돈을 벌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현실은 비루할지라도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나는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대체로 해보았다. 기대보다 나의 흥미를 끌지 못한 것들은 리스트에서 아웃됐고, 이제 소수의 몇몇 것들만 남았는데,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은 분명 있었으나 더 이상 그것들이 나를 설레게 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저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너무 급하게 산 나머지, 30대에 중년이 되어버린 걸까...

 답은 없어 보였다. 내가 해보고 싶은 것 중에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이 현실이 되는 것 말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강동원이랑 결혼하기, 친부모가 날 잃어버렸고 그들이 무척이나 좋은 사람들이며 돈도 많았다는 진실을 알게 되기, 내 마이너 한 작품에 온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기, 이 따위 것들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다음 이어진 선생님의 설명에서, 나는 진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평균치보다 높은 ‘자극추구성향’의 소유자였다. 새로운 것을 주기적으로 쫓아다녀야 만족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동시에 매우 높은 ‘공포회피성향’을 가졌다는데서 비롯됐다. 나는 내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재작년 즈음 테니스에 미친 듯이 몰두했는데, 성격상 동호회는 싫었던 나는 매번 전용어플로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좋은 분들도 만났지만, 무례한 인간들을 마주하자 테니스를 관뒀다. 그런 종류의 일이 내 인생에서 수도 없이 있었다.

 최근에는 영어공부를 어플로 혼자 하고 있는데, 실력이 향상되면 영어회화 모임에 나가고 싶었다. 꾸준히 하자 시제나 문법이 엉망일지라도 완결된 문장으로 말할 수 있고, AI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답해줬기에 AI도 하는데 실제 외국인이라고 대화가 안 통하겠냐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정작 외국인을 상대하면 버벅 대는 나 자신이 부끄러운 나머지 ‘힝.. 나 안 해!’ 또 도망칠 나 자신이 뻔히 그러졌다. 그래서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자극을 추구한다 -> 싫은 상황을 마주한다 -> 도망친다 -> 자극을 추구 못하니 불만족 -> 또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 싫은 상황 -> 도망...


 수없이 이 패턴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시작도 전에 관둬버리는 지경에 이른 거다. 그렇게 내 마음속 ‘하고 싶어!’와 ‘무서워!’의 퍼센티지가 막상막하로 싸우다 결국 ‘안 할래’ 리스트로 영영 넘어가버린 것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래도 나에게는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몇몇 취미들이 있다. 독서, 요가, 요리처럼 타인과 함께 하지 않아도 돼,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릴 확률이 낮을 것들. 그럼 그것들만 하면 된다. 새로운 책을 읽고, 다른 종류의 요가를 하고, 매번 다른 요리와 베이킹을 하는 것으로 자극은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다. 나는 안전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다. 그 세계에 내가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나도 몰랐던 내 자신이 내 머리채를 확 휘어잡았다.


“00씨, 관계욕구가 생각보다 높네요?”


 예? 제가요? 테스트만 하면 외향성 10-20프로에 내향성 80-90프로가 나오는 제가요? 친구 같은 건 20대 이후로 만들어본 적 없는 제가요? 직장도 안 다녀서 세미 히키코모리인 제가요? 하루 종일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는 게 일상적인 제가요?

 그렇다. 나는 항상 관계를 피해왔다.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은 경험이 별로 없는 데다, 나 스스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이 싫고 어울리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나 자신이 그들과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없는 것에 더 가깝다. 작년에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외향인이 내향인보다 행복을 느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구절을 읽고 억울해졌다. 그럼 나는...?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재밌는 사람인데, 그것을 아는 사람이 너무 극소수라는 게 이따금씩 슬펐다. 코미디언 뺨치는 사람은 못되지만, 나도 조금은 웃기는 사람이라고요...  나는 모두의 관심을 거부하는 아웃사이더인 척 살았지만, 은근히 관심받고 싶어 하는 소심한 관종(그러니까 필명으로 브런치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거다)이다.


 나는 일찍 중년이 되어버린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타인’이라는 변수를 제외하려니 할 수 있는 것의 범주가 너무 좁아진 거다. 욕구는 많은데, 두려움 때문에 그 욕구를 포기해 왔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평균 수명 100세 시대에, 고작 30년을 이런 나로 살아온 것도 이렇게 힘든데 남은 70년을 이대로 쭉 살아도 괜찮겠어? 나는 실버타운에서 다른 노인들과 섞이지 못하는 할머니가 아니라, 활발하게 수다를 떨며 즐겁게 놀다가 내 방으로 돌아가 충전 후에 다시 나가는 할머니, 죽을 때까지 그것을 반복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는 큰 용기를 내어 등산 동호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관심 있던 취미였으나 혼자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능숙한 등산러들과 등산에 한결 수월하게 입문해 보고 싶었고 (거저먹고 싶다는 뜻) 매번 새로운 산으로 간다는 자극 + 관계에 대한 욕구까지 충족 가능하니, 개이득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혼자 했던 취미들도 타인과 함께 하려는 시도를 할 예정이다. 상담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이 시점의 나는, 그동안 피해왔던 온갖 자극을 조금씩 추구하며 거의 완충이 가능해졌다.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감각이다. 물론 우여곡절이 있을 테고, 지속해 나가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강동원이랑 결혼하는 것보단 쉬운 일일 거다.


 나와 비슷한 상태를 호소하는 지인들에게 상담과 기질검사를 추천했는데, 검사를 받아본 지인이 후기가 무척이나 좋았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나, 명확하게 언어화할 수 없었던 '힘듦의 원인'을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도 설명할 수 있게 된 거다. 어쩌면 다음 유행은 기질검사가 될지도? 아니 됐으면 좋겠다. 물론 mbti나 혈액형보다는 다소 내밀하고 복잡한 결과지만, 그만큼 내가 궁금한 누군가에 대해, 그리고 나를 궁금해할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적어도 그것을 내 자신에게 알려주는 데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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