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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지 Apr 09. 2024

이게 다 내 인생의 빌런 때문이다

상담센터로 향하게 된 만든 그 녀석


 내가 상담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엑스와의 이별이었다. 앞서 말했듯, 작년의 나는 힘듦을 이겨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연애를 시작했으나, (당연하게도) 완패하고 말았다.


 흔히 혼자라도 괜찮을 때가 연애해도 좋은 상태이고, 혼자인 게 괜찮지 않을 때가 연애를 절대 하면 안 되는 상태라는데... 내 연애 패턴은 거의 후자였다. 내면이 평화로워 혼자서도 온전할 때는 아무도 찾지 않다가,  모종의 이유로 그 평화가 깨졌을 때에야 누군가를 찾아 나섰다. 그 연애가 망하리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면의 평화가 깨진 김에 망할 거면 차라리 장렬하게 망해버리자는 심정으로 연애시장에 뛰어들곤 했다. 직전의 연애도 ‘흠... 얘는 이렇고 나는 이러하니, 언젠가 요 모양 요 꼴로 망하겠군!’하고 끝을 예상하면서도 시작했고, 그와의 끝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90프로가량 일치했다.


 작년 초, 나의 내면의 평화가 깨진 원인은 일이었다. 나는 초년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최근 3년 동안 아무 성과 없이 제자리였다. 데뷔부터 주인공인 삶을 살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조연으로 전락해 버린 기분이었다. 그 덕에 어김없이 내면이 조금도 평화롭지 않았던 나는 사냥감을 찾아 집 밖을 어슬렁거렸고, 그가 내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그는 초반부터 나에게 빠졌다. 어떻게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럴 수 있겠는가. 그 역시 나만큼이나 내면의 평화롭지 못했던 거다...

 나는 금사빠를 경계하는 편이다. 금방 사랑에 빠진다는 건, 상대방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이상적인 상에 상대방을 끼워 맞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외로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뿐이라는 것도. 그의 금사빠적 모먼트와 온몸으로 내뿜는 외로움의 기운에도, 나는 선뜻 물리치지 못했다. 나 역시 그만큼이나 외롭고 힘들었으므로, 연애라는 무대에서만이라도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장르는 로맨스, 러닝타임은 미지수인 무대에, 우리가 극본, 연출, 주인공까지 맡았다. 무슨 장면, 어떤 엔딩이든 우리 뜻대로 써 내려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시간은, 고작 세 달도  채 되지 않았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그가 적역이라 여겼던 남자주인공 자리에서 그를 내쫓고 싶어졌다. 그여야만 했던 이유들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그가 아니어야만 하는 이유들만 덕지덕지 붙어갔다. 마치 그가 날 불행하게 하는 빌런 같았다. 다만 그가 더 나은 연기자가 된다면, 나의 극본과 연출에 딱 맞는 연기만 해준다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남자주인공이 바뀌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지는 않았다. 그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직 사랑했으니까.



 앞서 말한 내 상상과 달랐던 10프로는 내가 ‘차였다’는 거다. 연애 초반만 해도 나는 그에게 차일 가능성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시에 이별을 말했으나, 내가 다시 붙잡았고 결국 거절당했으니 차인 게 맞다. 내가 무대 밖으로 상대방을 쫓아낸 적은 있어도, 내가 무대에서 쫓겨난 적은 내 인생에 없었다. (물론 상대방이 나를 찰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내가 먼저 차버리는 비겁한 편법도 써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나는 이 무대의 엔딩이 새드일 수도 해피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그 결말은 내가 써 내려갈 것이라고 자만했다. 나는 흔히 그렇듯 원하는 애정을 주지 못한 구남친을 빌런 삼으며, 똥차를 대신할 벤츠를 찾아 나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무대 밖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채, 우리의 무대를 돌이켜보았다.


 나는 그를 조금 과하게 괴롭혔다. 나는 내 삶에 대한 불만족을 스스로 해결하길 포기하고 타인으로부터 해결 받기를 원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미 끝난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매일매일 그와의 첫 만남부터 헤어지던 순간까지를 복기하며,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끝없는 무의미한 전제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힘들다는 걸 누구에게라도 토로하고 싶었으나, 엑스에 대한 신랄한 뒷담을 충분히 나불댄 상태였기 때문에 쪽이 팔려서라도 그와의 이별을 후회한다는 사실을 차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내 감정을 털어놓고 싶어 상담센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 당시 상담의 최종목적은 ‘재회’였다. 내가 나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하려 노력 중이고 몇 달 뒤 극복했다는 걸 증명해 보여 그와 다시 만날 거라는, 깜찍하게 야심 찬 빅픽쳐가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상담선생님 앞에서 그의 뒷담을 까기 시작했다는 건 미리 말해두겠..)





 비공식적 상담목표는 그러했으나, 첫 상담에 가면 공식적인 상담목표를 정해야 한다. 


“제가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은 다신 없었으면 좋겠어요... (흑흑)”


 나의 가장 최악인 면은 스스로 감정을 어쩌지 못해 가까운 사람에게 생채기를 낸다는 거다. 나는 그 잘못을 저질러놓고 다음번에는 내가 그러지 않길 바라면서도,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노력은 한 적 없었다.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던, 나에게 심리상담을 추천한 누군가는 엑스였다. 당시 나는 시큰둥하게 굴었다. 헤어진 후에 내가 심리상담을 받을 거라 말하자, “예전에 얘기했을 때는 무시하더니..” 그의 말에는 왜 정작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때는 외면하더니, 이제 와서 그러냐는 원망이 담겨있다고 느꼈다. (아님 말구..) 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변하지 않아서 이 연애가 망한다면 그냥 망하는 거지 뭐, 하는 마음이었다. 이전의 연애가 그랬던 것처럼 그와의 연애가 망해도 상관없다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연애뿐만 아니라, 내 인생이 망하도록 방치해 둔 사람 아닐까?

날 망친게 숙희도 아니고 나라니...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항상 행복한데 가끔 우울한 사람과 항상 우울한데 가끔 행복한 사람. 나는 후자였다. 인생은 뽑기 같아서, 누군가에겐 운 좋게 전자의 삶이 주어지지만, 나는 그저 이 힘듦을 껴안고 버티듯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8할의 행복과 2할의 우울을 할당받을 때, 나는 반대인 게 때때로 억울하고 질투가 났지만, 감히 그처럼 되어볼까 욕심낸 적은 없었다.

 2할의 행복과 8할의 우울은, 내 키가 165 이상이고, 0씨 집안에서 태어난 것처럼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무언가였다. 다이어트나, 쌍꺼풀 수술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나에게 행복은 이상이었고 이상은 원래 가닿을 수 없는 거니까. 나는 행복이라는 개념을 거짓에 가깝다고 여기며 살았다.


 종종 우울해하고 행복한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가 물었다.


“00아. 널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할 수 있니?”
 “난 원래 잘 안 행복해.”


 그 대화가 떠오를 때마다 눈물이 났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으로 인해 행복하다는 감각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물론 그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인정욕구를 지녔기 때문도 있음을 이제는 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그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 버림받았다는 기분에 시달렸다. 그가 멋대로 만들어낸 환상 속 여자가 아님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대 위에서 내 멋대로 뛰어놀던 나는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마치 그가 낸 시험 문제에 오답 밖에 내릴 수 없는, 빵점짜리 시험을 치른 낙제생이 된 기분으로 몇 달을 보냈다.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해 버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쉽게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왜 내 행복을 타인에게 하청준 것처럼 살았을까? 왜 타인이 내 행복을 빚지기라도 한 것처럼 내놓으라고 떼를 썼을까? 내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을 왜 포기했을까? 아니, 난 왜 애초에 대체로 행복하지 못하고 우울할까? 나는 내 인생의 최대빌런은 직장상사도, 부모님도, 전연인도, 잘못된 세상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지독한 진실을 마주했다. 

 내가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상상하는 것처럼, 나는 상담을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를 상상했다. 내 오랜 습관이었다. 뭐든 부정적인 결말로 마무리 짓고 나서야 상상을 끝내는 것. 내가 변화를 외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변하기 위해선 뼈를 깎는 노력과 고통이 수반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미래의 고통을 담보 삼는 것으며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00씨는 변화에 대한 의지가 정말 강해 보여요. 그건 내담자로서 좋은 태도예요.”


 상담선생님의 그 말로 인해 내 손에는 또다시 펜대가 주어졌다. 극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무대에 오를 기회. 주인공은 나고, 남자주인공 같은 건 없다. (또 속절없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없어야만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돌아본 나의 상담목표는 재회도,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기도 아니다. 비록 실연으로 인해 시작된 여정이었지만, 나는 이를 긴 셀프구원의 여정으로 명명한다. 지난 연애들과 수많은 다이어트 시도처럼 결국 망하더라도 ‘망한 연애썰’보다는 ‘망한 셀프구원썰’이 더 간지 나지 않겠는가.

 내 인생을 망친 것도 나지만, 나를 구원하는 것도 나일 테니까. 그렇게 나는 오랜 습관을 뒤로한 채 해피엔딩을 향해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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