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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지 Apr 03. 2024

차라리 정신과라도 보내줘요...

고작 3만원 짜리 힘듦

#1. 프롤로그 




 작년 가을 즈음의 나는 분명 힘들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으나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각하게 여기기엔 너무 애매한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나는 유튜브나 책, 일상 속에서 각종 정신질환의 증상에 대한 정보를 들을 때마다, 혹시 나 우울증인가? 번아웃인가? ADHD인가? 의심했다. 하지만 해당 질환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나면 ‘아.. 난 아니네’ 뒷걸음질치곤 했다. 


 중증 우울증은 당연히 아니지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속 화자 정도의 경도 우울증마저도 아니었다. 나는 가끔 우울한 상태에 빠질 뿐이지 우울‘증’은 아니었던 거다. <젊은 ADHD의 슬픔>처럼 ‘성인 ADHD’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건 굳이 정신과에 방문하지 않아도 해당 책의 자가진단 파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요즘 그 흔하다는 번아웃도, 공황장애도 아니었다. 나는 온갖 유튜브와 관련 서적을 섭렵한 뒤에도 나의 힘듦에 대해 정확히 명명할 수 없었다. 나는 여러 질환들의 몇몇 ‘증상’은 겪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마치 ‘00함 초기증상’이라는 인터넷 게시글 속 체크리스트를 보던 중 혹시 난가? 싶었다가 ‘체중감소’에 뒤로 가기를 누르는 것처럼, 나는 수많은 질환에 ‘혹시 난가?’했다가도 ‘아니군’하기를 반복했다. 

 모든 질환에는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자폐증상에 대중들이 열광했던 건 자신도 자폐 스펙트럼에 속한다고 느꼈기 때문 아니었을까? 나 또 한 우울증, 번아웃, ADHD... 다양한 질환들의 스펙트럼 완전 끝 어딘가에 내가 걸쳐져 있다고 느꼈다. 애매한 외모, 애매한 스펙, 애매한 능력, 모든 게 애매한 나라서 힘든 정도마저 애매한 걸까... 차라리 애매해서 다행이라고 여기자고 애써 나를 다독였다. 

 

 누군가를 만나서 ‘나 요즘 이러이러하게 힘들다’ 말해도, 순식간에 그들 혹은 그들 주변이 겪는 다소 심각한 질환 얘기에 나는 별로 힘들 지도 않으면서 징징대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마는 기분이 들었다. 대부분의 테스트 선택지에는 아주 낮음-낮음-보통-높음-아주 높음이 있다. 보통은 보통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을 때, 나도 뭔지 잘 모르겠을 때, 애매할 때 찍는 선택지가 아닌가? 큰 소리로 또박또박 장황하게 징징대고 호소하기에 나의 힘듦은 너무 ‘보통’이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작은 소리로 주절주절 간략하게 말하다 징징대지도 호소하지도 못한 채 그냥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나는 어떻게든 괜찮아지기 위해 몸부림쳤다. 연애를 시작하거나, 새로운 취미를 갖거나, 금융치료라며 돈을 쓰거나. 하지만 사태는 더 심각해져 갔다. (어떻게 심각해졌는지는 후술 하겠다...) 애매할 거면 쉽게 괜찮아지기라도 하던가! 정신과에 가기엔 너무 가볍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기엔 너무 무거운, 딱 그 정도 무게에서 왔다 갔다 몇 년째 나는 은은하게 힘겨웠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데, 그럼 나는 뭔가? 감기는 왔다 가기라도 하지, 그럼 마음의 원인 모를 불치병이라도 된단 말인가?  

 차라리 정신과에 가서 약이라도 타먹을 수 있었으면, 번아웃이라도 와서 일을 관둘 명분이라도 생겼으면, 와르르 무너져버리기라고 했으면... 실제 해당 질환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실례가 될 상상까지 이어졌다. 괜찮아지지도 못하고 은근하게 망삘이느니 차라리 폭망으로 자멸해 버리고 싶었다.


당신의 내 심정...

 0부터 100까지 힘든 정도를 수치화한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20-30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일 거다. 100까지 치닫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0에 가깝게 꺼지지도 않은 채 2-30 사이 어딘가에 속하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00에 가까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고 해서 그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고통은 나아질 가치조차 없는 걸까? 그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무게를 느끼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이고, 그건 내 안에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뭐라도 했어야 했던 내 눈앞에 나타난 건, 심리상담이었다. 


http://ymcounseling.co.kr

 

 심리상담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속한 협회에서 무료로 총 10회 차의 심리상담을 받아본 적 있는 지인의 추천이었다. 그런데 해당 지원은 작년 기준으로 이미 마감되어 내년 2월에나 받을 수 있었다. 해당 심리상담을 제 값을 주고받으려면 회당 12만 원은 지불해야 했다. (분명 나아진다면 정신과도 불사하겠다 해놓고 보니, 나는 거지였다)  그럼 반년 가까이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지원자가 많다면 반년 뒤에 지원해도 될지 안 될지도 불투명했다. 좌절하던 차에, 서울심리상담센터(이하 상담센터)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상담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울심리상담센터는 인턴에게는 1만 원, 레지던트에게는 3만 원의 비용으로 상담을 제공한다. (다만 일정 회기가 넘어가면 비용이 추가된다) 회당 12만 원의 교수진 상담도 있다. 그건 나의 경제사정에 부담되는 비용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 나의 힘듦은 12만 원짜리까지는 아니었다. 딱 1만 원과 3만 원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는 객관적인 판단 하에, 레지던트 상담사를 택했다. 혹시 그 이상의 상담이나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상태인지 전문가의 소견을 받아보고 싶기도 했다. 


 그 어떠한 질환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뒷걸음칠 치며 내가 느꼈던 감정은 ‘소외감’이었다. 나도 번아웃이야, ADHD래, 우울증이야 하며 그 어떠한 무리에게도 소속감을 느낄 수 없다는데서 오는 외로움.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기보다, ‘넌 아니니까 저리 가’하며 누군가에게 밀쳐져 그들이 속한 원 밖으로 내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공감과 소속감, 일체감이었다. 어쩌면 앞의 것을 느낄 수 없어서,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붕붕 떠다니는 기분에, 나는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면 나의 상태가 너무나도 ‘보통’이라서 더욱 ‘보통’의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올림으로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나는 이제 막 4개월 간, 16회 차의 심리상담을 끝냈다. 이 글은 심리상담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지만, 심리상담 기록은 아니다. 심각하게 여기기엔 너무 별 거 아니지만, 별거 아니라고 여기기엔 너무 심각한, 너무 보통의 힘듦에 대해 써보려 한다. 우리 모두가 12만 원짜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1-3만 원 사이의 힘듦은 겪고 있지 않느냐고, 죽고 싶을 정도가 아니라도, 정확한 병명을 붙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도 충분히 ‘나도 힘들다’ 큰 소리로 외쳐볼 수 있지 않냐고. 고작 3만 원짜리 힘듦이라도 이 지면을 빌어 마음껏 ‘징징’ 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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