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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Lee Oct 10. 2024

나의 본업은 망나니

나는 부유한 집안 덕에  사회 첫발을 아버님이 관여 하던 군화 납품회사에 상무 이사로 시작하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 인 샘이다

이때 나의 나이는 불과 23세의 철없는 어린 나이였다. 나는 하루아침에 중소기업의 임원이 되었다. 군화 납품회사인 신영개발에 상무이사로서 영업 및 관리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군화 납품업은 정부가 지정한 10개 이내의 제한된 업체가 군 당국으로부터 돌아가면서 수주를 받는 사업구조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에 나만큼 좋게 말해서 호방하게, 나쁘게 말하면 방탕한 생활을 한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사업은 땅 집고 헤엄치기였다.

특별히 영업활동을 하지 않아도 돈은 자동적으로 벌리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 배경으로 상무 감투를 쓰고 있다 보니 무소불위(無所不爲)였다. 나이 든 관리자들은 일은 자기네들한테 맡기고 회사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철없는 어린 임원을 공기돌 놀리듯 놀려 먹기는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나의 본업은 여전히 술 마시기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본격적으로 기방 출입을 시작하면서 방탕한 생활은 날로 더해 갔다.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회사 경영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보다 못한 아버지는 회사의 권리를 타 회사에 팔아 넘겼다. 

군화납품 사업은 나름대로 나에게 귀중한 체험이었고, 중요한 교훈을 가져다 줬다고 할 수 있다. 군납 사업은 당시로서는 일종의 특혜사업이었으므로 일단 사업권만 따면 어렵지 않게 많은 돈을 벌수 있었다. 실제로 다른 동업사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반면에 우리 회사(신영개발)의 수지 상태는 그저 회사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술독에 빠져 나날을 보냈던 나는 왜 그런지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야겠다. 

이 사업은 정부로부터 미국 원조를 받는 소가죽과 생고무를 지급받아 임가공하여 군화를 납품하는 사업으로써, 군화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원자재인 수입 가죽을 얼마나 잘 빼돌려서 활용하느냐로 큰돈을 챙기는 사업구조였다. 그런데 군 당국에게는 덩치가 작은 국내산 소를 기준으로 원자재(소가죽)사용량을 계산하는 한편, 실제로는 국내 소보다 몇 배 큰 덩치의 미국 텍사스산 수입 소가죽을 사용했다. 그러니 수입권을 보장받은 군납업체 입장에서는 원자재 조달 단계에서부터 3〜4배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구조였다. 나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른 채 본사에서 거들먹거리며 실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 

쇠가죽 군납 시장은 내가 상상도 못했던 요지경이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새벽녘에 수입된 쇠가죽이 대전 조달청 창고에 입고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차떼기로 엄청난 물량의 쇠가죽이 시장으로 빼 돌려졌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다른 회사뿐 아니라 우리 회사 사람도 한몫을 챙기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아래 사람들이 냄새나는 쇠가죽 수령을 하느라 새벽에 잠도 설친 채 고생한다고 측은히 여기고 감사했다. 직원들은 담배도 싼 담배를 그것도 꽁초까지 아껴가며 피우고 의복도 항상 허름하게 입고 다녀서 회사 임원으로서 내심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은 번듯한 집을 2,3채씩 지니고 있는 등, 진짜 알부자들이었다. 회사로부터 착복한 돈으로 말이다. 

배신감과 참담한 심정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결국은 내 자신의 불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현장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업은 잃었지만 대신 큰 교훈을 얻었다. 그 후로는 어떤 일이든 내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직접 업무 처리를 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었다.   


이러한 한심한 짖거리를 하는 아들도 자식이라고 아버지는 또 다시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 군화 회사 매각 자금으로 지금의 저축은행 전신인 상호신용금고를 설립해서 어린 나를 또다시 대표이사로 임명, 회사 운영권을 전적으로 나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를 더 깊은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꼴이 되었다.   

나는 사장이랍시고 당시로서는 최고급 세단인 크라운을 몰고 다니면서 밤마다 무교동 유흥가를 누비고 다녔다. 만취 상태에서 차를 마구 몰다가 죽을 뻔 한 사고를 내기도 했다. 아무도 나를 말리지 못 했고, 나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야말로 기고만장이었고, 오만의 극치였던 시절이었다.지금 생각 하면 낯 뜨거워서 생각도 못할 지껄이를 거침없이 해대고 다녔다, 당시 유흥업소에 종사 하던 아가씨들은 요즈음 아가씨들 하고 전혀 달리 무능한 세대주를 대신 하여 생계를 꾸려 가기 위하여, 또는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하여 업소에 나오는 순수한 여인 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순수한 여인들을 상대로 자기 말을 잘 들어 주지 않는다고 폭언을 퍼부어 대는 것 뿐 아나라,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던 망나니 였다.

사장이란 작자가 이모양이니 회사가 더군다나 현금을 다루는 명색이 금융회사가 잘 굴러 갈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나스스로 아버지에게 말이 금융업이지 사채업자나 동일 하여 젊은 사람이 운영하기에는 적합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워 완전히 사업을 털어 먹기 직전에 사업을 접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시작한 것이 유통업이었다.

당시 정부에서 유통 근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슈퍼체인업체를 지정하여 유통의 근대화 및 소비자와 생산자를 직결하여 소비자에게 보다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유통구조 개선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슈퍼체인 허가 신청을 하고 ‘생협슈퍼체인’ 이라는 상호로 사업권을 획득, 수행하게 되었다.

문제는 또 술이었다. 거래 업체들과의 교제 술자리가 불가피했고, 이를 핑계 삼아 자연스레 술집 출입이 이전 보다 더 다양하고 잦아졌다. 새 사업을 통해 행실이 달라지고 바로 잡히기는 커녕, 오히려 나의 사생활은 종전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져 나갔다. 심지어는 졸지에 ‘이혼남’ 이라는 기록이 호적에 남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 또한 전적으로 나의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행실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소상한 내용을  숨길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해당되는 분들이 입게 될 마음의 상처와 손상될 명예를 염려해서 나의 죄책감의 일단만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방탕한 생활을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는 더 이상 못 참아 주시겠다며, 크게 화를 내셨다. 아버지의 호된 꾸짖음에 나는 내가 맡았던 업무를 다 내려놓고 회사도 떠나고 급기야 집을 나왔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으나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했다. 그러나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 길로 나는 남대문에서 자개 공예품을 취급하는 친구를  찾아가 그 회사의 해외수출 전담 임원으로 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따라 종합상사를 지정하여 각 분야의 수출이 활성화 되던 시점이었다. 나는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열심히 영업을 한 결과, 예상 밖의 실적을 올리게 되었고 내 나름대로의 신상품을 개발한 것이 적중하여 많은 판매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친구의 양해를 받아 단독으로 수출 오퍼상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내가 개발한 아이템 중 코란경을 자개 글자로 개발한 상품과 자개 꽃병들이 당시 중동 특수에 힘입어 사업이 나름대로 번창하게 되었다

이렇게 번창 하던 나의 사업은 이번에는 나의 실수가 아니라 상상도 못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맞아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이렇듯 젊은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경력을 갖고 살아 오면서 나같은 망나니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잘 이겨 내고 노년에 행복한 삶을 살아 왔는가 하는  나의 인생 역정을 글을 통해 마음을 나누어 보았으면 하여 사정이 허락만 된다면 글을 이어 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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