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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지인 Dec 12. 2023

단호한 디저트 카페

단호하게, 은은하게

보람이나 진지함은 일뿐 아니라 놀이에서도 똑같이 요구된다. 그것을 뺀 놀이는 지루하다. 그러므로 일과 놀이는 내용적으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나누어야만 한다.
-와시다 기요카즈-



처음 카페 창업을 앞두고 카페의 이름을 구상할 때, 제일 먼저 후보가 된 이름은 ‘단호한 카페’였다.

단호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디저트가 있는 카페.

단호박을 좋아하는, 다분히 나의 할모니 입맛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컨셉이었다.


미쿡스타일의 설탕글레이즈된 펌킨 스콘과 펌킨파이, 꾸덕한 단호박갸또케이크, 촉촉한 단호박 파운드, 단호박 브라우니까지 말 그대로 단호하디 단호한 디저트 카페를 꿈꿨다.




10월이 기다려졌다. 10월은 단호박이 가장 맛있는 계절..!

단호박을 반으로 가르는 순간, 곱디 고운 노란빛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빛깔, 진정한 자연의 색이다. 그 예쁜 단호박으로 퓨레를 만들어 놓으면 그런 비장의 무기가 또 없다. 퓨레를 만드는 수고로움은 물론 정성도 그런 정성이 없지만, 본연의 개성을 잃지 않은 데다가, 온갖 종류의 디저트에 다 잘 어울리고, 맛 또한 상당하니 단호박은 내겐 어마어마한 식재료였다. 해남밤호박, 제주단호박, 뉴질랜드 단호박, 각각 수확시기에 따른 수분도에 따라 결과물이 자칫 달라지기에 원물을 조절해 가며 반죽이 너무 되지도, 질지도 않게 조절해야 했다. 그러한 감을 잡기까지 이래저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재미있었다. 분명 그것은 베이킹놀이였지만 그러면 진지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베이킹연구라고 했다.


제주의 청정 자연에서 자란 제주단호박을 주문한다.

단호박을 반으로 갈라 180도 오븐에 굽는다 속을 파내어 퓨레를 만든다. 그렇게 만든 퓨레로 케이크를 굽는다. 스콘을 굽는다. 쿠키를 굽는다.



단호박퓨레가 떨어지면 주문부터 다시 반복한다. 점점 실력이 늘어난다. 점점 맛있어진다. 그렇게 점점 단호박디저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디저트 카페를 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어떤 목표를 세운적은 없다. 목표를 세우는 건 부담스럽다. 이루지 못하면 기분만 잡치기 때문이다.


1인 카페의 운영자로, 다양한 일을 직접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건 굳이 큰 결심을 하지 말고, 그냥 하다 보면 습관이 되고,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실력이 는다는 것이었다. 자격증 같은 건 하나도 없다.


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내 몸이 시스템이 되어 저절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같은 일을 해도 에너지가 덜 소모된다. 모든 계량 데이터는 머릿속에 암기되어 있고, 손은 점점 빨라진다. 이 모든 것들이 물 흐르듯이 은은하게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피드백을 통해 레시피가 수정되기도 한다. 점점 디저트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완성된 결과물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일이 많아진다. 응용 또한 가능해진다. 베이킹의 세계가 확장된다.


언제 내가 이렇게 전문가가 되었을까 싶다.

행복하려고 한 적은 없지만, 불현듯 행복하다고 느낀다. 관념적이고 실체가 없는 행복이라는 감정과 가장 닮아있는 것은 성취감이라는 것이 단연코 맞다는 생각이 든다.

마흔이 넘어도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넘쳐난다. 성장은 자기 계발서만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모든 게  장사를 잘하자고 하는 것이지만, 원가를 따지고, 이거 하나 팔아서 얼마나 남는지, 매출에만 골몰하기 위해 매일 출근해야 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출근하기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자영업자가 아닌, 카페의 디렉터로 인식하고 싶다.


고된 일상을 꿋꿋하게 이어나가는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디저트

그것이 내가 매일 연출하는 단편영화의 주제이다.

카페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일터가 아닌 게 된다.


사실 노동집약적인 일들, 단순노동에 가까운 일들에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카페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시스템이 되었을 때, 더 이상 그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되었을 때 당연히 그 이외의 것들, 더 많은 것들을 내다보게 된다. 그렇게 인사이트가 생기면서 전문성도 높아지고 성장하게 된다.


모든 일이 그렇다. 단호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심각할 필요는 없다.

굳은 결심과 각오, 의지 따위는 수많은 다이어트를 통해서 이미 효용이 없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무엇이든 가볍고 은은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일단 하면 된다고 본다. 그 이후의 일들은 일단 하고 나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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