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지인 Dec 05. 2023

제물포 아카이브

카페, 기억 저장소

열흘후면 나의 생일이다.

그리고 카페의 생일이기도 하다.

마흔의 생일날, 새롭게 카페를 개업하면서 나는 내사십대가 밝게 빛나리라 생각했던 걸까..


드디어 3년을 버텨냈다.

꽉 찬 3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왔다.

버터내기 위해 카페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만은 무분별한 카페창업의 1인이 아니라는 실로 가소로운 믿음이 있었다.


나만은 다르리라는 이 믿음은, 이제와 생각해 보면

마치 이 나쁜 남자가 나를 만나면 개과천선할 거라 믿으며, 남들이 모두 말리는 연애를 시작하는 것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지독한 연애 끝에 남은 건,

코로나시기에 저이율로 받은 소상공인 대출 2천과 시큰거리는 손목.

손등피부가 부르트고, 손 가락가락이 시큰거리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겨울이 찾아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카페창업부터 폐업까지 ‘평균 3년’이란 말을 실감한다.

3번째 생일을 앞둔 카페에는 기쁨보다, 나의 한숨과 회환들로 아로새겨지는 듯하다.



빛바랜 물개가 이곳에서의 시간을 말해준다


‘Up to 90’까지 온갖 세일을 알리는 알림 메시지로 인해 11월은 정말 힘든 달이었다.

다들 재고를 털기 위해 심히 안달이로구나..

할인율은 네가 살 확률이라지만, ‘up to 90’의 유혹도 뿌리친 나.


쓱데이도 무사히 넘기고,  블랙프라이데이도 무사히 넘겼건만, 마지막 더블유데이에서 자칫 무스탕을 살뻔했던 위기도 있었다.

 ‘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내가 날 위해서 인조 무스탕 한벌도 못사!’ 하고 순간, 깊은 분노에 차올랐지만, 사실 무스탕 입고 마을버스 타고, 카페에 출근할 텐데, 기껏 무스탕 입고 강아지산책이나 시킬 텐데 매일이 위기인 ’아프니까 사장이다‘ 에겐 인조무스탕도 사치일 뿐.  


그렇게 우울감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 쯤,

‘1호선 제물포역 2번 출구에서 50미터 정도 걸어오면 분명 카페가 있는다고 했는데 어디 있는 거냐‘며 손님이 전화를 하셨다. 내가 몸소 그곳까지 찾아간다는데 도대체 너 어디에 숨었니? 싶은 카페 위치가 심히 죄송할 따름이다. 이러한 손님들뿐만 아니라 분명히 주소지에 왔는데 카페가 없다며 전화하시는 배달라이더들도 많다.

‘주소지에서 코너 끼고 조금만 올라오시면 입구가 있어요 ‘를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나의 말투가 AI 못지않다


-거기 주차장은 있나요?

-주차장은 따로 없고요 제물포역 공영주차장을 이용해 주세요


그러면 열의 아홉은 오지 않는다

주차장이 없는 카페는 서글프다.

하지만 카페 앞은 항상 주차전쟁이다

크고 작은 주차시비가 끊이질 않는다.


카페 앞 이동인구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폐휴지를 줍는 노인, 산책하는 노인, 치매에 걸린 노인은 항상 같은 시간에 가게 앞을 지나간다

저 중에 내 모습도 있을까?



사실, 제물포역에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흘러넘치다 못해 바글바글 거리던 때도 있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 근방에서 여중, 여고를 나왔기 때문이다.

항상 떡볶이를 먹으러 왔던 곳, 교복을 맞추던 곳, 열심히 돈을 모아 파파이스 핑거휠레를 먹었던 이 곳 제물포역..



그 많았던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가 있을까?


그 학생들 중 몇몇은 간혹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카페를 방문해 옛날 라테시절을 곱씹으며 회상에 잠기기도 한다.


우리 카페는 가정집을 개조한 구옥인데

누군가에겐 이곳이 자주 오던 분식집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겐 자고 가던 친구집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겐 친척집이기도 했다.

그랬던 곳이 카페가 되었으니, 그들에겐 무척이나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다.


구옥이 오래된 만큼 많은 이들의 기억과 추억이 저장된 것이다. 내 나이만큼 나이를 먹은 이 카페가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담고 있을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3년 동안 카페에서 다양한 손님들을 보았다.

카페에서 싸우는 연인.

휴가 나와 제일 먼저 들러 혼자 디저트를 음미하던 군인.  

함께 소울을 보고 와서 이동진보다 더 진지하게 영화후기를 나누던 세 모녀

지금은 기력이 쇠하신 30년 전의 은사님을 모시고 와서 추억을 얘기하던 영화여상 합창반 여고동창생들.


이제 이곳은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저장되게 될까? 그리고 나는 이곳에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내가 만든 커피향기와 달콤한 흔적들



불혹의 나이에 카페를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참 다행이었다. 젊었을 땐 했다면 아마 지금처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행히도 이만큼 나이를 먹으니까 보이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벌었으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상에서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놀라운 수입을 올리며 자랑배틀에 뛰어들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다들 조용히 있는다는 것을 말이다.


온갖 귀찮은 일을 떠안아야 하는 것이 사장이었고,

운이 좋아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도, 직업이 되는 순간 하기 싫어지며,

때로는 지리멸렬한 일상을 무덤덤하게 반복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굳이 심각한 척하지 않고서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에게는 단지 찐한 말차라테로

단지 갓 나온 스콘 하나로

서비스로 드린 휘낭시에 하나로

혹은 조각케이크 하나에 꼬아준 초 하나로

그도 웃고, 나도 웃고,

굳이 큰 노력이 아니어도 잠깐의 설렘을, 잠깐의 따뜻함을 타인과 내 자신에게 선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기에 삶을 또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구도심지역에 불어닥친 재개발 열풍으로 이곳은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것으로 예전처럼 다시 사람들이 많아질지는 미지수다.


점점 유동인구가 줄어드는 제물포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발걸음과 그 추억과 기억이 소중해진다


연말이다.

카페 3주년 기념일 즈음엔  이곳에 많은 이들의 웃음과 따듯한 기억이, 이전보다 조금은 더 많이 저장되기를 소원해 본다.



누군가의 피, 땀, 눈물 가득한 구옥 카페 리모델링/ 2020.4~12월




이전 04화 나의 단골은 어디에 있는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