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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지인 Dec 26. 2023

Peace-tachio

선택과 결정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끌어 보게 된 ebs다큐 속,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쇼핑과 주문, 배송, 언박싱, 잠깐의 설렘과 흥분 후, 다시 쇼핑과 주문을 반복하는 한 주부의 일상에 입이 턱 벌어진다. 이로 인해 온갖 물건과 택배박스로 가득 차 발비딜틈 없는 집안 상태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도 잠시, 더 놀라운 건 이렇게 숨 쉬듯 인터넷쇼핑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불안과 근심을 다 끌어안고 사는 듯한 그녀의 우울한 얼굴 때문이었다.


아니, 원하는 것을 다 사들이는데 왜 저런 얼굴일까? 그녀의 인터뷰화면 하단으로 이름, 나이, 그리고 ‘과소유증후군’이란 말이 함께 보였다.


과소유증후군(stuffocation): 소유로 인한 질식 상태. 물건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데서 받는 스트레스 물건(stuff)과 질식(suffocation)의 합성어. 보통은 자신이 과소유 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엇을 얼마큼 사고 있는지 모르거나 자신의 집이 얼마나 많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는지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다. 많은 물건을 소유하다 보면 관리가 힘들어지고 물건을 찾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아 이것은 다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그 스트레스로 더 소유하고 싶은 욕구로 이어진다. 과소유증후군과 저장강박증은 오히려 사회 취향계층에게서 많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마음과 물질적인 가난함에서 비롯된 불안과 우울이 오히려 물건에 예민해지고 더 가져야 한다고 집착하는 증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증후군이 있지 않나?


태사장(42) / 과메뉴증후군 / 디저트카페 운영 중


과메뉴증후군: 과메뉴로 인한 질식 상태. 메뉴가 너무 많은 데서 받는 스트레스 상태로 자신이 고가메뉴 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매장에 얼마나 많은 메뉴로 채워져 있는지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다. 매출저하로 인한 자구책으로 메뉴를 늘리다 보니 점점 관리가 힘들어지고 이것은 다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유발해 그 스트레스로 더 메뉴 가짓수를 늘리고 싶은 욕구로 이어진다



개업부터 유지해 온 6~7가지 종류의 갸또케이크를 마침내 없애기로 하고 냉장 쇼케이스를 매장에서 치우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다. 단순히 냉장고를 빼버리는 문제가 아니라, 메뉴를 없애는 고통이 함께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지지부진한 매출에서 벗어나고자, 선택과 집중을 위해 디저트 가짓수를 대폭 축소하기로 결정하면서, 제일 먼저 판매가 저조한 케이크를 메뉴에서 없애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이렇게까지 힘들 줄이야. 나의 과오, 실패를 마주하는 두려움, 그나마 있던 손님들마저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까지 더해져 버리는 스트레스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고작 케이크를 메뉴에서 빼버리는 것쯤인데, 그로 인한 나의 고생과 수고, 열정과 에너지 이걸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었는데 하는 애잔함까지 비롯해 케이트를 맛있다고 해주었던 손님들의 칭찬과, 추억까지 함께 모조리 삭제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간직했던 소중한 추억의 물건을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다가 급기야 버리는 것과 버려지는 것이 동일시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매여있는 것이다. 물건이든, 무형의 무엇이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니, 그 속에 함몰된 것과 같았다. 결국, 냉장고 하나 버리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선택과 결정의 문제가 되어버리다니..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반년 이상을 망설였던 쇼케이스가 매장에서 나가고, 초창기부터 유지해 온 카페공간이 격변하면서, 손님의 동선이 바뀌고, 일하는 나의 동선도 바뀌었으니, 내 딴에는 대변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사부작사부작 소소하게 카페공간이 리디자인 되었다.


before & after



솔직히 특유의 카페 분위기가 사라진, 평범한 보통의 카페가 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난 이제 보통을 사랑하기로, 보통에 맞추기로 결심한 이후였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하지만 이전의 모습을 많이 버리고, 선택과 집중한 결과는 실로 의미 있었다. 단순히 메뉴를 축소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잘 정리된 공간에서 단단한 바닥을 밟고 있는 안정감을 주는 것과 동시에 내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나의 역할과 내가 원하는 목표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손님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없어진 메뉴를 찾는 분들도 이전 모습을 그리워하신 분들도 계셨지만 말이다)


나는 내가 앞으로 삶에서 어떤 결정과 선택 앞에 놓여있을 때,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것이 결코 최악의 결정이 되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선의 결정이라고 분명 심사숙고해서 내린 선택이 다소 기대에 못 미치는 결정이 될 순 있으나, 그것이 최악의 결정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무언가를 버려도 결코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실은 과도하게 의미부여했을 수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 대단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착각에 불과하다.


그냥 버릴 것은 버린다. 버리는 일에 더 이상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기로 했다. 그만큼 나 자신을 믿는다는 나의 삶의 태도를 확인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잘 버렸고, 잘 비워졌으며,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더욱 몰두한 끝에 피스타치오로 만든 디저트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Pistachio는 Peace-tachio


sweet & simple & 꼬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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