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치란,
그러나 스토너는 자신이 살 수 있는 행복에 가까이 가고자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1. 이디스
이디스의 거의 모든 것을 다 참아내던 스토너가 묵묵히 참아내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다. 그레이스이다.
“아이를 이용하지 마시오.” 그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요. 당신도 알 거요. 다른 건 뭐든 괜찮지만, 계속 그레이스를 이용한다면 내가.....”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잠시 뒤 이디스가 말했다. “당신이 뭘요?” 오기가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내 곁을 떠나는 것뿐인데, 당신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
“윌리 ... 난 그 아이를 사랑해요. 내 딸이니까요.” ...
이것이 진실임을 알기 때문에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을 뻔했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것이 스토너가 이디스의 횡포에 대응한 전부이다. 나는 이디스를 보며 줄곧, 이디스는 왜 저럴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으며 순간 깨달았다. 이디스가 왜 그러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디스를 바꿀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디스를 버린다고 행복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은 바꿀 수 없는 불행이 그저 주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화를 내도, 아무리 현명하게 대처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것들. 스토너는 순간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울부짖을 뻔한 그 마음을 그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끝내고 평생의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2. 루맥스
찰스 워커와의 일은 조금 다르다. 루맥스와의 갈등을 스토너는 분명히 피할 수 있었다. 고든 핀치가 루맥스가 학과장이 될 것이며 찰스 워커의 일을 적당히 합의하여 처리하자고 미리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토너는 찰스 워커가 교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에 루맥스와의 갈등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겪는 모든 불행을 묵묵히 견뎌낸다.
스토너는 결코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불행을 피하거나 갈등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불행을 견디더라도,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것은 무척 강한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다. 루맥스의 뜻에 자신을 맞추지 않은 것은 행복만을 위해 살고자 하지 않은 것이고, 이디스의 횡포를 견딘 것은 행복을 위한 길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3. 캐서린
이디스와의 관계가 나쁘다고 하여 캐서린과의 관계가 정당하느냐,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캐서린과의 사랑을 끝내며 스토너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가 모든 걸 던져 버린다면..... ....(중략).... 모든 것이....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오. ... 우리 둘 다 지금과는 다른 사람, 우리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거야.” (중략)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도 세상의 일부인 거요. 그걸 알았어야 하는 건데.”
스토너는 루맥스가 캐서린의 삶을 파괴할 것을 알고,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둘의 관계는 끝난다. 스토너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의 이별이 이디스도, 그레이스도, 사랑 때문도 아니라고. 세상의 일부인 우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인식이 캐서린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스토너는 행복하게 살고자 했으나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우정과, 사랑과, 지혜와, 순수성을 원했으나 그것을 갖지 못했다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 되뇌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스토너의 삶이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행복하고자 했으나 많은 불행 속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행복하려고 노력했다. 행복을 위해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또 불행 속에 놓였으나 신념을 버렸다면 다른 종류의 불행에 놓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놓쳤지만 또한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 스토너의 선택은 현실적이었다. 주어진 인생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작품은 1965년에 출간되었고 1, 2차 세계대전이 소설 속에서 흐르고 있다. 스토너의 부모님은 빈농이었다. 스토너가 불행을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적 사건은 개인으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역사적 사건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디스를, 로맥스를 받아들여야 한다. 때로 자기자신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캐서린을 보내야 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로맥스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조금쯤 자기자신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선택이 무엇이든, 그 선택의 결이 스토너와 다를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스토너와 같은 존재이다.
어쩌면 우리는 순간순간, 자책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토너가 마지막 순간에 그러했듯이. 그러나 어쩌면 진실에 가까운 것은 이러한 생각일 것이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살아낸 이 긴 시간 속에서 각각의 불행은, 그래,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나는 문득 요즘 자주 듣는 노래, ‘내 마음에 비친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많은 사람들, 자기자신을 지키고자 애쓰는 무수한 인생들, 그 삶이 비록 기대한 곳에 가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더 이상 무엇을 더 보태야 할 것인가. 그 순간순간이 가치의 전부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