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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의 버드나무 Jan 12. 2022

뽀꼬 아 뽀꼬(poco a poco)

스페인에 도착한 지 일주일 되던 날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려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쁘게 머리 손질을 하고 목에 진주 목걸이를 착용하신 전형적인 스페인 멋쟁이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턱이 있겠는가? 다만 우리나라 어르신들이 낯선 이방인들을 보면 늘 물어보시는 내용일 거라 추측되었다. 즉 어느 나라에서 왔냐? 어떻게 여길 오게 되었냐?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냐? 분명 이런 물음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없고 답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표정과 말투로 봐서 우리들에게 호의적인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곳 스페인에서 적응 잘하고 잘 지내라는 말씀인 것 같았다. 그 와중에 할머니가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었으니 

"뽀꼬 아 뽀꼬" 란 말이었다. 

발음도 귀엽고 독특했다. 그리고 하도 여러 차례 말씀하셔서 내 머릿속에 꼭 박혔나 보다.


나중에 스페인어 공부를 하면서 그 말이 우리말로

" 조금씩 조금씩 " "천천히" 란 걸 알았다.

그러니까 그 할머니는 시간이 지나면 스페인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아라. 빨리 못 배운다고 기죽지도 말아라. 조금씩 천천히 알아 가라는 격려의 말이었는지 모른다.


이후 내가 만난 대부분의 스페인 사람들이 그런 취지의 말을 했다. 그것으로 보아 그 할머니도 그런 말씀을 했을 거라 추정해 본다. 그만큼 스페인 사람들은 "뽀꼬 아 뽀꼬"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한편 "빨리빨리 "란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그래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그 말이 실리기도 하였다. 일본의 식민 치하에서 수탈을 당하고 6.25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나라. 그 가난을 벗어나 오늘날의 부를 재빠르게 이루게 한 원동력이기도 한 "빨리빨리". 그렇다. "빨리빨리" 문화 덕에 오늘날의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빨리빨리"에 익숙했던 나는 스페인의 "뽀꼬 아 뽀꼬" 문화가 답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그들의 여유로운 "조금씩, 천천히" 문화에도 배울 점이 많이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식사 중에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런 가르침 때문인가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뉴얼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듯 빨리 먹는 경향이 있다. 직장에서 1시간 남짓한 점심시간 동안 식사뿐 아니라 개인적인 볼일을 보아야 하는 경우 더 빠르게 식사를 하기도 한다. 때론 식사시간 자체도 업무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서구 사람들에 비해 위염이나 위암 같은 위장 질환자가 많다는 통계 결과도 있다. 가정 내에서도 가족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기는 분위기는 아니다. 때로는 식사가 빨리 마쳐야 되는 과업이 되기도 한다.


반면 스페인 사람들은 식사시간이 매우 길다. 

학교 교육 과정 자체에 점심시간이 두 시간으로 책정되어 있다. 스페인의 세나 (sena)라 불리는 저녁식사는 2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보통 오후 8시에 시작해서 밤 10 시쯤 끝난다. 그리고 그들은 식사 내내 이야기를 나눈다. 


"빨리빨리" 문화에 속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기 위해 먹는 사람들 같다면 "뽀꼬 아 뽀꼬 문화" 속에 스페인 사람들은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 같다.


스페인의 대중교통인 버스의 문턱은 매우 낮다. 

보도의 평면과 버스 바닥면이 거의 똑같은 높이이다.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위해 휠체어 사용을 쉽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버스 기사는 운전석에서 일어나 이분들을 위해 휠체어를 밀어 주기도 하고 좌석에 앉도록 도운 뒤 휠체어를 잘 접어 보관해 주기도 한다. 다른 승객들은 기사님이 이렇게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배려하는 과정을 기다려 준다. 버스가 늦게 출발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천천히 기다려 주며 배려한다. "뽀꼬 아 뽀꼬 "문화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빨리빨리" 문화가 몸에 밴 즉 성과를 중시하는 대기업 영업부장이었던 남편은 스페인을 비롯한 라틴어 문화권의 씨에스타(햇빛이 뜨거운 오후 2시경을 전후로 하여 낮잠을 자는 제도)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에 대해 나는 씨에스타 문화가 더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쪽이다. 어차피 능률이 오르지 않는 오후 시간. 점심 식사 후 식곤증으로 나른해진 몸의 원기 회복을 위해 과감하게 낮잠을 즐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잠깐 쉬어 가는 것이 장기적인 차원에서 일의 효율을 높이는 방책일 수 있다.


나와 남편의 의견 차이는 "빨리빨리" 문화와 " 뽀꼬 아 뽀꼬" 문화의 충돌이기도 하다.


"빨리빨리" 나 "뽀꼬 아 뽀꼬"의 장단점을 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두 문화 다 기후와 환경과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적응한 결과 나타난 삶의 가치관일 뿐이다.


 다만 너무 앞만 보고 빨리 달리느라 잃은 것은 없는가?

"뽀꼬 아 뽀꼬" 천천히 천천히 여유롭게 생각해 볼 일이다. 


스페인 학생들과  보호자들의 모습. 사진 속의 할머니 모습이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의 모습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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